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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나는 저 펜은 만년필인가?

우리 주변 과학 이야기

by 전영식

예전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몇몇 물건이 선물로 선호되었다. 번듯한 정장에 구두나 손목시계, 사전이 있었고 만년필(萬年筆, Fountain pen)이 거기에 포함되었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려면 필기할 일도 많을 거고, 어엿한 성인으로서 자기 이름 석자를 여기저기 멋지게 써넣으라는 뜻이 있던 것 같다. 분명히 중요한 계약서나 합의문 등에 서명할 일은 아직 없었지만 말이다.


2025년 8월 25일(현지시간)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미대통령이 첫 만남을 가졌다. 보도에 따르면 만남의 내용은 차치하고 일단 눈길을 끄는 것이 '만년필 에피소드'였다. 이 대통령은 백악관의 오벌 오피스 바로 옆 ‘캐비닛 룸’에서 방명록에 서명했다. 이때 뒤에서 지켜보던 트럼프 대통령은 서명에 사용된 필기구에 관심을 보이며 "도로 가져가실 것이냐. 난 그 펜이 좋다. 두께가 매우 아름답다. 어디서 만든 것이냐"라고 폭풍질문을 했다. 이쯤되면 당연히 주고 오는게 맞고 이대통령도 그리했다. 이 상황을 언론에선 만년필을 주었다고 보도하면서 국내 특정 필기구 업체의 주가가 가격제한폭까지 뛰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우리나라에는 만년필 제조사가 없는데 말이다.


청와대 만년필.jpg 청와대 만년필, 출처: 대통령실


만년필이란


만년필잉크통에 저장된 잉크를 모세관 현상(毛細管現象, Capillary action)을 이용하여 적당히 흘려보내 글씨를 쓰는 고전적인 필기도구다. 잉크만 계속 넣으면 언제까지나 쓸 수 있고 샘물(Fountain)처럼 잉크가 샘솟는 펜이라는 의미다. 옛날에는 유수필(流水筆), 자래필(自來筆)이라고도 했다.


만년필은 잉크 펜의 발전형으로써, 그 기원은 고대 이집트와 아랍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만년필은 1884년 미국에서 평범한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Lewis Edson Waterman, 1837~1901) 창업자가 모세관 현상을 이용해 균일하게 잉크를 배출하는 펜을 발명하며 등장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당시 큰 계약을 진행하다, 실수로 잉크가 종이 위에 쏟아졌고 그래서 계약을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큰 손해를 보고 분노한 워터맨은 적정량의 잉크만을 자동으로 흘려보내주는 펜을 개발했다. 그 이전의 잉크 필기구는 잉크를 저장만 하는 정도에 그쳤고 그 흐름을 통제하지는 못했고, 잉크를 찍을 때마다 잉크가 튀는 문제점도 있었다.


Fill_in_Your_Xmas_List_with_Waterman's_Ideal_Fountain_Pen_-_Advertisement_-_1915_public domain.jpg 아이디얼 만년필로 크리스마스 선물 목록을 채워보세요, 워터맨 광고(1915), 위키미디어: public domain


만년필의 구조 및 원리


만년필의 외부는 손으로 잡는 배럴(barrel), 뚜껑(cap)과 클립(clip)으로 되어 있고, 보통 나사 방식으로 열고 닫게 되어 있다. 내부는 펜촉(Nib), 피드, 섹션 그리고 잉크 컨버터로 구성되어 있다.


anatomy of fountain pen.png 만년필의 구성도 , 출처: The Goulet Pen Company


만년필의 펜촉은 다양한 금속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스테인리스 스틸촉과 금촉으로 나뉜다. 금촉은 14K, 18K의 금으로 만드는데, 잉크의 화학물질로부터 산화작용에 의한 부식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며 탄력성이 좋아 고급 만년필에 많이 쓰인다. 펜 포인트라고 불리는 펜촉 끝부분의 물질(Tipping material)은 대부분 이리듐(Iridum)으로 만들어진다. 공룡이 멸종된 백악기-팔레오기(K-Pg) 경계에서 많이 검출되는 그 금속이다. 펜촉의 두께에 따라 두꺼우면 딱딱한 필기 느낌, 얇으면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펜촉의 명칭, 위키미디어: Francis Flinch


펜촉의 가운데에 뚫려 있는 구멍을 Heart Hole 또는 Breather Hole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둥글지만 하트, 화살촉, 타원 또는 네모 형태도 있다. 구멍이 작을수록 펜촉의 양쪽 금속 부분인 Tines가 적게 벌어져 강한 느낌이 나고, 클수록 부드럽게 느껴진다.


만년필의 작동 원리는 펜대의 안쪽 공간에 주입된 잉크(또는 카트리지)가 모세관 현상을 통해 촘촘한 피드를 거쳐 펜촉으로 잉크가 흘러가 종이에 쓰이는 방식이다. 잉크 공급 장치와 펜촉 사이에 있는 피드는 만년필 잉크를 버퍼링 하는 역할을 한다. 버퍼링은 펜촉 쪽으로 쓰는 것 외의 다른 상황에서 발생하는 잉크 넘침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만년필 펜촉에 이러한 잉크 넘침이 생기면 잉크가 번지거나 흘러내리는 버핑(burping) 현상이 발생한다.


JoWo_ink_feed_&_housing_Francis Flinch.jpg JoWo #6 잉크 공급 장치(Feed)(하)와, 하우징(상), 위키미디어: Francis Flinch


만년필이 종이에 닿으면 펜에 가해지는 손의 힘과 무게로 슬릿(펜촉의 중앙에 있는 선형 공간)이 살짝 벌어지게 된다. 이때 이미 잉크는 모세관 현상으로 피드에 내려와 있는데, 피드의 잉크 채널에 차오른 잉크가 슬릿(모세관이다)을 타고 흘러 펜촉 끝부분에 닿는다. 그 상태에서 펜촉 끝부분의 잉크가 역시 일종의 모세관인 섬유로 된 종이로 이동되며 글씨가 써지는 것이다. 즉 두 번의 모세관 현상이 관여되는 것이다.


섹션은 펜촉과 피드를 고정시키는 부분으로, 사용자의 손가락이 닿는 부분이다. 컨버터(또는 카트리지)는 잉크를 저장하는 부분이다. 리필이 가능하게 펌프식이나 피스톤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일회용 카트리지는 다 쓴 빈통을 빼고 새것을 꽂으면 된다.


만년필의 글씨 두께 규격은 브랜드나 제조사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EF(Extra Fine, 0.5mm~0.7mm), F(Fine, 0.7mm~0.9mm), M(medium, 미디엄, 주로 사인용, 0.9mm~1.0mm), B(Broad, 1mm 이상) 등이 국제적으로 통용된다. 이 밖에도 사용자의 필압, 종이의 성질, 잉크의 특성 등에 따라 글자의 굵기는 달라질 수 있다.


명사들의 만년필 사랑


영국의 전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파카(Parker) 51 만년필과 펠리컨(Pelikan) K400 볼펜, 몽블랑(Montblanc) 마이스터스틱 149(서독의 헬무트 수상, 스페인 소피아 대비도 사용)를 애용했다고 한다. 아들 찰스 3세는 즉위식에서 은으로 만들어진 몽블랑 146 Sterling Pinstripe Solitaire와 파커 프리미어를 사용했다. 왕실에서 많이 써서 그런지 영국 총리들도 공식 석상에서 만년필을 많이 사용하는데, 보리스 존슨은 파카 듀오폴드 만년필, 리시 수낙이 파이로트 브이펜을 썼다고 한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펠리컨 100N과 워터맨 펜 22를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증거는 희박하지만 히틀러는 펠리컨 100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만년필을 즐겨 쓴 한국 작가로는 소설가 최명희, 시인 박목월, 소설가 선우휘, 소설가 박완서, 소설가 박경리 등이 유명하다. 만년필의 독특한 필기감과 깊은 매력이 만년필 사용을 이끌었다고 보인다. 한국 문인들은 주로 파커 45를 애용했다. 박완서는 1977년 첫 산문집 <나의 만년필>에서 시조 시인 이영도 여사와 엮인 만년필 사랑을 잔잔하게 썼다. 삼성의 고 이병철, 이건희 회장은 몽블랑 만년필을 애용했다고 한다.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마이스터스튁 149'로 완성했다고 한다.


만년필의 퇴조


만년필은 한동안 필기구 시장에서 고급 필기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만년필은 관리나 사용에 있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노동집약적인 필기구였고 잉크도 일일이 넣어야 했으며 손에 묻기 일쑤였다. 때문에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볼펜이 발명되고 유행하자 만년필은 필기구로써의 거의 준사망신고를 받았다. 이에 몽블랑을 시작으로 만년필의 고급화가 진행되었고 파커 등 저렴하고 편리성을 더한 제품이 나오면서 나름 대도 시장을 형성하며 생존했다. 이제는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보기 힘들고 사치재로써만 자리메김한 형편이다.


하지만 만년필은 아니었다...


Trump_and_Kim_signing_joint_statement_White House.jpg Trump and Kim signing joint statement, White House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과 만나 공동합의문을 서명했는데, 이때는 만년필을 쓰지 않고 굵은 유성팬인 샌포드(sandord) 사의 샤피 3300을 사용했다. 또 2018년 9월 24일 한미 FTA 서명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자신이 사용한 샤피펜을 즉석에서 선물했다(요즘도 사인한 팬을 나눠주기도 한다). 당시에도 일부 언론은 이를 고급 만년필로 오해했지만, 청와대는 “트럼프가 평소 좋아하는 유성 사인펜”이라고 밝혔다(기자들은 원래 만년필을 좋아한다). 이 에피소드는 저렴하고(개당 1000원 미만) 실용적인 샤피펜이 트럼프의 유별난 사인 방법(만년필로는 택도 없는 지진파형 사인이다)에 맞는 적합한 펜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주로 검은색의 굵은 펜촉(Sharpie Magnum 또는 Sharpie Permanent Marker)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7_signature_of_Donald_Trump_(cropped)_Senator Luther Strange_public domain.jpg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인, 2017, 위키미디어: Senator Luther Strange, Public Domain


640px-Sharpie-marker-types_Evan-amos.jpg Sharpie-marker, 위키미디어 : Evan-amos


이번 이대통령과의 회담 전에 이 대통령의 펜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은 고급진 외장(샤피펜은 저렴해 보인다)에 두툼한 그립감에다 필기감이 좋아 보여 탐낸 것이 아닌가 싶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도 사용하지는 않을 거지만 잘 보관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사실 해당 제품은 원목 속에 '모나미 수성 네임펜'을 삽입한 것이란다. 대통령실 의전 행정관이 문래동에 있는 공방에 주문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케이스 등의 외장과 문양, 금속은 수작업으로 하는데 2달 정도 걸린다고 한다. 굵은 글씨용 해당 삽입 제품이 500원 내외인 것을 보면 실용성과 멋진 외장을 동시에 갖춘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정상급 인사가 공식 석상이나 중요한 문서에 서명할 때는 만년필을 사용하는 것을 격에 맞는 품위 있는 행동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이번 만년필 소동을 통해 아직도 그런 상식이 일부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옛날에 사다 놓은 만년필은 잘 있는지 날씨가 선선해지면 좀 찾아봐야겠다.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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