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과학 이야기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3년에 알츠하이머병이 국내 10대 사망 원인 중 6위에 올랐다. 또한 알츠하이머치매 관련 연간 진료비는 약 2조 3,000억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4년 12월 26일 질병관리청이 발간한 ‘2024 만성질환 현황과 이슈’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사망자(35만 2,511명) 가운데 알츠하이머병은 사망 원인 6위(1만 1,109명)로 전체의 3.2%를 차지했다. 주요 사망 원인으로는 암(24.2%)이 1위를 차지했으며, ▲심장질환(9.4%) ▲폐렴(8.3%) ▲뇌혈관 질환(6.9%) ▲고의적 자해(4.0%)가 뒤를 이었다.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은 치매의 한 종류로 전체의 60~80%를 차지하는 병이다. 뇌에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과 타우 단백질이 비정상적으로 쌓여 뇌신경세포가 손상되고 죽어가는 퇴행성 질환이다. 1907년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 (Alois Alzheimer) 박사가 최초로 보고했다. 본인도 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우 서서히 발병하여 차근차근 진행되는 무서운 병이다. 초기에는 주로 최근 일에 대한 기억력에만 문제를 보이는데, 진행하면서 언어기능, 공간감각이나 판단력 등 다른 여러 인지기능의 이상을 동반하게 된다. 결국에는 신경장애와 섭식장애 등이 발생하여 발병 후 8~13년 사이에 사망에 이르게 된다.
치매가 소재가 되는 영화는 많다. 그중에서 두 개를 꼽으라면 단연 <스틸 앨리스 Still Alice>(2015)와 <더 파더 The Father >(2021)이다. 소재가 갖는 중량감에 원작 소설과 원작 연극이 주는 완성도가 최고이다. 시간을 다루는 방법도 <스틸 앨리스>가 선형적이라면, <더 파더>는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다르다. 장르적으로도 서정적인 드라마와 미스터리 스릴러로 대비된다. 그리고 단연 당대 최고의 두 남녀배우의 등장이라 영화에 몰입하게 한다. 당연하게도 각 영화로 두 주연은 각각 아카데미 주연상(87회, 93회)을 수상했다. 두 배우는 이미 주연상을 받은 바 있는 명연기자이다.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질병을 다룬 두 편의 수작, <스틸 앨리스>와 <더 파더>는 질병을 앓고 있는 당사자의 내면을 깊숙이 들어가서 관객에게 큰 울림을 준다. 두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치매라는 병을 그려내며, 배우들의 명연기와 독창적인 연출을 통해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스틸 앨리스>는 저명한 언어학 교수 '앨리스'(줄리안 무어 분, Julianne Moore, 1960~)가 희귀성 조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면서 겪게 되는 변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담담하게 그려낸다. 완벽한 어머니이자 아내, 총명했던 지식인이 단어를 잊고, 동네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등 점진적으로 기억과 자아를 상실해 가는 과정을 앨리스의 시점에서 그려간다. 영화는 앨리스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절실한 노력과 함께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사랑 그리고 현실을 섬세하게 그려간다.
<더 파더>는 노인성 치매를 앓는 '안소니'(안소니 홉킨스 분, Philip Anthony Hopkins, 1937~)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게 하는 특이한 구조를 취한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 인물의 정체성이 끊임없이 뒤섞이며 혼란스러워하는 안소니의 시점을 정말로 두서없이 그려낸다. 처음에 관객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혼돈을 느낀다. 점차 영화가 진행되면서 안소니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생생하게 경험하며, 마치 한 편의 심리 스릴러를 보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두 영화의 중심에는 주연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력이 자리한다.
<스틸 앨리스>의 줄리안 무어는 컬럼비아 대학교수의 지적인 매력과 가족에 대한 사랑, 본인의 자아에 대한 집착 등 섬세한 감정 연기로 앨리스라는 인물을 완벽하게 연기한다. 강의 중 익숙한 단어를 잊어버리는 순간의 당혹감, 기억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아를 지키려는 의지를 눈빛과 표정의 미세한 변화로 뛰어나게 표현했다. 앨리스의 남편 '존' 역의 알렉 볼드윈과 딸 '리디아' 역의 크리스틴 스튜어트 역시 안정적인 연기로 영화의 재미를 더했다.
<스틸 앨리스>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내면을 외부자의 시선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질병의 고통을 신파적으로 과장하지 않고,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와 사랑의 가치를 되묻게 한다. 이 영화는 치매를 소재로 한 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며, 질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더 파더>의 안소니 홉킨스는 치매 환자의 혼란과 분노, 슬픔,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넘나드는 경이로운 연기를 선보인다. 그는 대사의 뉘앙스, 표정, 몸짓 하나하나에 안소니의 무너져가는 정신세계를 담아내며 관객을 압도한다. 특히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엄마가 보고 싶다"라고 오열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명장면이다. 안소니 홉킨스는 이 영화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대 최고령(84세) 남우주연상 수상 기록을 세웠다. 그의 딸 '앤'을 연기한 올리비아 콜맨 또한 혼란스러운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연민, 지쳐가는 현실의 무게를 섬세하게 표현하며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더 파더>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활용하여 치매 환자의 주관적인 경험을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색다른 방식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영화사적 의의가 크다. 연극 원작을 바탕으로 한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천재적인 각색과 연출은 관객을 주인공의 머릿속으로 이입시키고, 기억의 파편화와 현실 왜곡을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 이는 단순히 질병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느끼게' 함으로써, 치매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영화는 전형적인 치매 증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묘사하는 방식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스틸 앨리스>는 치매의 객관적인 증상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다. 주요 장면으로는 기억력 감퇴(강의 중 단어를 잊거나, 약속을 까먹고, 같은 질문을 반복), 지남력(指南力, Orientation) 상실(매일 조깅하던 익숙한 길에서 방향을 잃고 헤맴), 실행 능력 저하(간단한 요리법을 기억해내지 못함), 감정 변화(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불안해하는 등 감정 기복이 심해짐), 요실금(집 안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해 실수를 함) 등이 나온다. 이러한 증상들은 질병의 진행 단계에 따라 점진적으로 나타나며, 관객은 앨리스의 변화를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더 파더>는 치매 환자가 겪는 주관적인 내면의 혼란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주인공 안소니는 기억 왜곡 및 혼동(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음), 인물 혼동(딸의 얼굴이 다른 사람으로 보이거나, 낯선 사람이 자신의 집에 들어와 있다고 믿음), 시간 감각 왜곡(시간의 흐름이 뒤죽박죽이 되어 방금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함), 편집증 및 불안(자신의 물건(특히 시계)을 누가 훔쳐갔다고 의심하며 불안해함), 정체성의 붕괴(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고 극심한 혼란에 빠짐)를 겪게 된다. <더 파더>는 이러한 주관적 경험을 비선형적인 편집과 미장센의 변화를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함으로써, 관객이 치매라는 질병의 공포와 슬픔을 절망적이고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따라서 <스틸 앨리스>가 치매라는 질병에 맞서 싸우는 한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통해 감동을 준다면, <더 파더>는 질병의 본질적인 공포와 혼란을 관객에게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깊은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내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치매라는 공통된 소재를 다루면서도 각기 다른 접근 방식을 통해 그 자체로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급격한 고령화에 따라 치매 환자의 비율도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 치매 발병 전에 대부분이 사망했다면 평균수명의 증가에 따라 많은 사람이 치매 발병 나이까지 생존하기 때문이다. 중앙치매센터의 2024년 자료에 따르면 전국 65세 이상 추정 치매 환자 수는 2019년 약 71만 명에서 2023년에는 87만 명, 2030년에는 121만 명, 2050년에는 226만 명으로 증가하여 노인인구 10명 중 1~2명이 치매를 앓게 될 것으로 추정됐다. 따라서 많은 주변 사람들도 가장 걱정하는 질병이 치매이다. 하지만 아직 완치가 불가능하고 일상 요법으로 진행만 늦출 뿐이다.
매년 9월 21일은 치매극복의 날이다. 세계보건기구와 국제알츠하이머협회(ADI)가 함께 1995년부터 지정한 날로 가족과 사회의 치매 환자 간호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자는 계기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2011년 “치매관리법”이 재정되면서 지정되었다. 치매는 이제 현실이 되었다. 가족 중 누군가 치매에 걸리면 남겨진 사람의 일상도 완전히 달라진다. 오존층 보호의 날, 암 극복의 날 같은 것은 점점 희미해가지만, 치매극복의 날은 이 시대에 가장 핫한 기념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스스로 알츠하이머병을 진단하고 환자를 위해 은퇴한 신경과 의사인 대니얼 깁스(Daniel Gibbs)는 그의 책 <치매에 걸린 뇌과학자>(더 퀘스트, 2025)에서 초기 단계에서 유산소 운동, 지중해식 또는 마인드 식단, 독서와 같은 정신을 자극하는 활동, 사회적 참여, 양질의 수면 그리고 당뇨나 고혈압의 적절한 관리를 한다면 인지 예비능을 키워 병의 진행을 유의미하게 늦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별한 주문도 아니고 이미 일반적인 이야기라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꾸준히 하나하나씩 실천해 보면 손해 볼 것이 없다. 혹시 아는가 여러분 중 누군가가 우리나라 최장수 기록을 달성할지 말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차곡차곡 정신건강을 지켜야 한다.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