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과학 이야기
시작은 순조로웠다. 맑게 갠하늘에 적당한 기온, 비소식은 어디도 없다. 주말의 한적한 지하철은 여유로웠다. 평소보다 금방 도착한 듯한 기차역에서 김밥과 음료수를 준비했다. 답사여행을 다니다 보면 시간과 적당한 식당이 없어 점심을 거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출발역에 대기하는 기차엔 아무도 없다. 서서히 자리를 찾아드는 주말의 승객은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옆자리가 비기를 기대한 정도로 여유로웠다. 정말로 처음 출발은 좋았다. 다음 정차역에서 멋진 젊은 여성분이 앉기까지는 정말 순조로웠다.
기차는 지하 터널을 통과하며 서서히 남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차창에 비치는 옆자리의 테이블은 파우치에서 꺼낸 화장도구로 하나둘씩 채워졌다. 아이섀도 팔레트, 각종 메이크업 브러시, 팁브러시, 눈썹집게, 거울, 메이크업 베이스, 파운데이션, 컨실러, 팩트, 블러셔, 아이브로우, 아이쉐도우, 아이라이너, 마스카라까지 외과의사의 수술도구처럼 한상에 차려진 그 도구들은 거창했다.
기초화장품과는 달리 페이스 화장품은 얼굴의 모공을 감춰주고 난반사를 없애 광택이 나는 효과를 내기 위해 탈크, 이산화티타늄 등 분체 성분을 사용한다. 흔히 로션 베이스에 혼합하여 사용하지만 얼굴에 고루 펴 바르기 위해 브러시나 퍼프를 이용해서 바르는데, 이때 필연적으로 미세 입자(PM) 가루성분이 날릴 수밖에 없다.
집에서야 화장대 앞에서 하니까 그 부분만 가루로 오염되겠지만, 사람이 오가고 고속으로 운행하는 기차 내에서는 공조시스템에 의해 공기의 흐름이 강제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가루가 널리 퍼질 수 있다. 사람의 몸에서 떨어지는 각질이나 음식의 부스러기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코로나19 기간 동안은 객차 내에서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했다. 요즘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냉난방이 잘 되기 때문에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유화된 제형의 제품이 아니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볼터치(블러셔) 같은 제품은 가루를 펴 바르는 형태라서 더욱 떨어져 나와 실내에 퍼지기가 쉽다. 객차는 고속으로 주행하기에 공기의 흐름이 정적이 아니라서 그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본인뿐 아니라 주변사람의 안점막과 호흡기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게다가 화장한 채로 마스크를 착용하면 입자가 호흡기관을 통해 폐로 더 깊숙이 유입될 위험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공공장소의 위생
기차나 지하철의 손잡이, 시트 등 여러 사람이 만지는 물건을 만진 손으로 화장하면 손에 옮겨왔던 세균이 피부에 쉽게 옮겨갈 수 있다. 또한 실내에는 먼지가 많이 떠다니는데, 선크림이나 파운데이션 같은 끈적한 제형의 화장품은 이러한 공기 중의 오염물질을 피부에 달라붙게 하여 모공을 막을 확률이 높다. 오염된 환경에서 화장 도구(브러시, 퍼프 등)를 사용하거나 떨어뜨린 도구를 제대로 세척하지 않고 사용하면 먼지나 세균이 피부에 닿아 여드름, 뾰루지 등 다양한 피부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움직이는 차량에서 눈 화장을 하다가 눈을 다치거나 감염될 위험도 크다. 기차 실내에서 화장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화장품 파우치는 변기보다 두 배가량 더 오염될 수 있으며, 방치 시 장염이나 피부 트러블을 유발하는 세균이 증식할 수 있다. 파운데이션, 블러셔 등에서 페카리스균(뇌수막염 원인), 표피포도상구균(항생제 내성 유발), 프로피오니박테륨(여드름 유발) 등의 유해세균이 검출되었으며, 이는 유통기한이 지난 화장품에서 특히 더 잘 발견된다. 유통기간을 확인하고 사용하는 사람은 정말로 얼마 안 된다.
오염된 화장품 사용은 피부 발진, 가려움증과 같은 피부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심하면 안질환, 장염 등의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파우치와 화장도구는 최소 일주일에 한 번 세척하고 완전히 건조 후 사용해야 하며, 유통기한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마도 집에서 화장할 시간이 없는 사람이 일주일마다 세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옆자리 사람에게 한마디 할 만한 배짱은 없지만 마스크는 있다. 나는 슬그머니 마스크를 쓴다. 다행히 창가에 앉은 내가 먼저 내릴 차례가 되었다.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기는 나를 보고 옆자리 아가씨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냉큼 복도 쪽으로 일어나 길을 내어준다. 살짝 웃으며 인사하는 것 같은 느낌은 화장 탓일까.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처음에 옆에 앉았던 사람이 아닌듯해서 섬찟한 느낌이 살짝 들었다. 플랫폼의 공기는 상쾌했다.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