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의 화려함이 마냥 즐겁지는 않다.
집 앞의 은행나무에 노란빛이 절정이다. 푸른 잎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비바람이 없어서 며칠은 더 햇살에 빛나는 노란 잎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골목길의 한 귀퉁이에 있는데, 요행인지 그 많은 전선을 피하여 자리 잡은 덕분에 가지가 잘리는 수난도 겪지 않았다. 올해의 마지막 화려함을 뽐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후 주차장을 뒤덮을 낙엽을 생각한다.
봄철 새잎의 연초록과 단풍은 좋아하면서 왜 낙엽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할까. 이제 골목길을 쓰는 것은 구청 미화원들의 업무가 되었고, 주민들의 내 집 앞 쓰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낙엽에 대해 들려오는 말은 지저분하다는 것과 비탈길을 미끄럽게 한다는 것이 전부다. 도시에서 저 모습을 보는 것 자체를 행운으로 여겨야 할 텐데…
장인어른의 기일을 맞아 처가에 다녀왔다. 길이 멀어서 자주 못 가고, 집안에 일이 있을 때만 가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장거리 운전도 부담으로 다가온다. 단풍철과 겹쳐서인지 고속도로 차량흐름은 좋지 못했고, 오가며 길에서 지체한 시간이 기대와 서운함보다는 그저 피곤으로만 남았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가을의 변화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고향의 연로하신 부모님과 혼자되신 장모님을 뵙는 일이 이제는 마냥 기대와 즐거움이 아니다. 노화의 흔적들이 너무 많이 보이고, 나누는 대화에서도 미래에 대한 것이 적다. 그저 단편적인 대화만 오간다. 왜 노년의 빛깔이 회색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세월의 흔적이라고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오래 남는다.
드라마 ‘정년이’를 보면서 판소리 단가인 ‘사철가’를 알게 되었다. 그저 지나는 길에 한 번 듣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가사를 전부 확인해 보았고 유튜브에서 다른 명창들이 부르는 여러 동영상을 찾아서 보았다. 부르는 것은 어렵지만 들으면서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가능하다. 세월의 회한을 담은 명창들의 소리가 귓전에 오래 남는다.
하필 양가의 부모님을 뵙고, 제사를 모시는 이 시기에 들어서인가.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어서인가. ‘세상사 쓸쓸하더라’라는 가사는 봄꽃을 보면서 하는 노래하는 대목이지만 단풍 및 낙엽과 어우러진 이 계절에도 잘 맞는 표현이다. 애써 밝은 모습을 보여드리려 노력했지만, 내 머리도 이제는 흰머리가 더 많은 걸 어떡하나.
제사에 시집간 처조카의 어린 남매가 참석했다. 다섯 살 누나와 세 살 남동생. 제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모처럼 방문한 외가의 큰집에서 얌전하게 있으라는 말과 뛰지 말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다. 1분도 되기 전에 웃고 떠들며 천방지축인 아이들은 그나마 집안의 분위기를 밝게 했다. 요즘 보기 어렵다는 어린애들을 둘이나 본, 운 좋은 날이었다.
후진국에서 태어나 자연물을 가지고 놀던 세대의 눈에 희한한 장면이 보인다. 세 살짜리가 벌써 태블릿을 가지고 놀면서 ‘뽀로로’와 ‘아기상어’ 동영상을 찾아서 볼 줄 안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보는데, 잠시 집안이 조용해지는 시간이다. 밝은 미래세대들은 이렇게 커가고 있다. 제삿날, 주름살과 티 없이 맑은 웃음이 교차하는 묘한 시간과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