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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Sep 29. 2023

양껏 편애하는 계절

그리던 손님이 찾아오면



알람은 반으로 접어 넣어 두고 밀린 잠으로 착실히 시간을 갚아나가는 일요일 아침, 창문을 끝까지 열고 반만 일어난 얼굴로 빛을 받아내다 다시 고대로 벌렁 누워버렸다. 불과 며칠 전까진 어림도 없던 뽀송한 바람이 두 뺨에 착-하고 자리를 잡는데 마음이 일렁거려 그러했다. 빨래하고 깨끗이 갈아 끼운 은은한 라벤더향이 올라오는 이불 안에서 꼼지락대는 발재간도 양껏 부려보고 싶었다. 신선이 노니는 선경 부럽지 않은 내방 침대에서 세상 가장 편한 자세로 다가온 가을을 먹고, 마시고, 흥에 취해있기로 했다. 야무지게 순간을 누리려는 장면 안에 음악이 빠지는 건 앙꼬 없는 찐빵이지, 하며 옆에 누인 핸드폰을 주워 음악앱에 들어간다. 이맘때의 향이 짙게 배인 이문세 아저씨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키고 두 눈을 슬며시 감는다. '소녀', '옛사랑', '사랑이 지나가면'. 달짝지근한 음색과 선율에 관절 마디마디가 부드러워지는 하나같이 지금에 필요한 곡들이다. 그중 이 무드에 어울리는 배경음악 1위는 뭐니 뭐니 해도 제목마저 '가을이 오면'.


노래 부르면 떠나온 날의 그 추억이

아직도 내 마음을 슬프게 하네

잊을 수 없는 님의 부드런 고운 미소

가득한 저 하늘에 가을이 오면


음악을 틀어놓은 것뿐인데 음률이 들어간 시 한 편을 읽는 기분이다. 옛날 노래들은 마음 한 군데를 툭하고 건들고 지나가는 무엇이 있다. 좋게 말하면 서정이 물씬 풍긴다고 할 수 있고 아니 좋게 말하면 쓸쓸해서 청승맞다.(그래서 청승맞고 싶은 날이면 옛날 노래부터 뒤적거리게 되었던 건가.) 그윽하고 고요하고 고독하다. 지금 바로 생각나는 사람에게 저 구석에 있는 말을 꺼내 손 편지를 쓰고 문방구에 가서 우표를 사다 붙이고 길가에 세워진 우체통을 찾아서 편지 봉투를 넣는 번다한 과정을 해보고 싶은 감성이다. 소화되지 않는 무언가가 몸 안에 돌아다니며 온몸의 세포가 꿀렁꿀렁 사무치는 감성. 그래서 좋다, 라고 말하고 싶은 감성.



한참을 누워 애틋한 가을 정서가 묻어있는 이불속에 파묻혀 있었다. 푹푹 찌는 날씨에 땀에 젖은 옷이 몸에 착하고 달라붙는 눅눅함을 견뎌온 시간에 엄살 피우고 싶었다. 더운 것을 참아내기 어려웠던 몸의 부속품들도 이 시간을 기다려왔다고 다가와 소곤거린다. 가을 앞에 선 내 모습은 순두부 같다. 뽀얀 마음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여름은 언제 돌아가는 거냐며 실없는 손부채질만 하다가 모르는 새 코 앞까지 와버린 손님에 어쩔 줄 몰라 몽글몽글 흐드러져 버린다. 그러다 어느새 저 멀리까지 앞장서 등을 보이면 멍하니 바라보고 군침만 삼킨다. 매번 그런 식이다.



성질머리를 부릴 대로 부리는 여름이 좋아질 수 없는 만큼, 점잖은 가을을 편애하는 이유는 백 가지도 넘게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1. 가을을 업은 바람에는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한 낭만이 묻어있어 두근거린다.

2. 인생 절반에 걸쳐 집순이인 사람도 이 날씨를 그냥 돌려보내기가 아까워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

3. 곡식은 황금빛 물결의 결실이 되고 가을 과일은 풍성하고 유난하게 맛있다. 은은한 맛만큼 미각 세포를 깨워 음미해야 하는 짧고 굵은 무화과 시즌은 사랑이어라. 아차하고 돌아서면 막을 내리니 부지런히 먹어줘야 한다.

4. 내 주위를 둘러싼 볕, 공기, 정취와 분위기가 딱 맞게 떨어지니 기분은 높아지고 생산성은 덤으로 좋아진다.

5. 추석을 안고 있는 즈음이면 일상을 멈춤하고 한 박자 쉬어간다. 때에 따라 비워낼 수도, 채울 수도 있다. 정서적으로 충전하고 일신을 돌보는 시간이 된다.

6. 여름과 겨울에 단벌신사가 되는 사람도 옷장을 열어 옷을 고르는 일이 재밌어진다. 덥다는 핑계로 모든 의욕이 사라지는 여름은 밋밋한 티셔츠로 때우기 일쑤다. 보온이 최고인 겨울은 겹쳐 입은 옷가지만큼이나 양어깨가 무거워 밖에 나가기도 전 기운이 빠진다. 좋아하는 카디건을 색색깔로 골라 입을 수 있는 가을은 고소하다. 원피스부터 바지, 티셔츠, 카디건 등을 요리조리 겹쳐 입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더없이 흥나는 계절이다.

7. 눈 떴을 때 느껴지는 날씨에 온몸으로 행복이란 말을 흡수하며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8. 바스락대는 낙엽길을 걸으며 산책하는 시간을 누린다. 샛노란 은행나무, 검붉은 단풍나무, 무드 있는 카멜톤의 나무들과 떨어진 잎들은 고요의 힘을 완성시켜 주는 산책 친구들.

9. 사실 이유는 필요 없다. 가을은 그 자체로 사랑이니까.


이유를 찾으라면 더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절대 이유가 동나서 급하게 마무리한 것이 아니다.) 쓰면서 한 번 더 알게 된 건 가을을 확실하게 편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너 어디 한 번 맛 좀 봐라!, 하는 매운맛 7단계쯤의 직전 계절에 질려 떨어져 나간 것도 한 몫하는 것 같다. 이 정도로 꾸준히 비교하며 싫다고 얘기하다니, 여름에 만약 인격이 있었다면 나를 앉혀놓고 자기 사정을 늘어놓으며 서운함을 토로했을 것 같다.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지. 세상의 모든 좋고 싫음은 숨길 수 없는 문제니까. 숨긴다 하더라도 태도에 결국 묻어나게 되니까.



눈 깜짝할 새 왔다 훌쩍 떠나가는 그를 보며 입맛만 다시지 말고 제대로 사치 좀 부려봐야겠다. 본격적으로 마음먹고 구석구석에서 나는 가을 냄새를 맡으러 이제 곧 출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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