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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23. 2023

벽 뚫은 여자


   이 집에서 최고의 자리는 부엌이다. 부엌은 뒷마당과 나란한 정남향 직사각형이다. 설거지나 요리를 할 때 남으로 향한 창으로 마당을 바라보는 일은 만만치 않은 노동의 무게를 덜어준다. 그런데 문제는 거실이다. 부엌 옆으로 거실의 일부가 빛을 받긴 하지만 긴 부엌 벽이 빛을 막는 바람에 거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 집을 처음 만난 날부터 그 벽을 없애고 싶었지만 늘 마음뿐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한 해를 갇혀 지내는 동안 그 벽을 자꾸만 쏘아보았다. 벽이 점점 거실을 밀어붙이는 느낌이 들었다. 부엌과 거실을 나누는 기둥을 없애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전문가의 답변을 듣고 용기를 냈다. 벽을 통째로 없애려 했으나 아래의 수납공간이 필요해 결국 윗벽만 제거하고 큰 창을 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년 전에도 작은 일을 벌였었다. 낡은 부엌 캐비넷을 모두 하얗게 칠하고 손잡이도 단순한 디자인으로 바꾸었다. 며칠 몸살을 앓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결과는 만족이었다. 그 일로 자신감을 얻은 이유도 있었다. 

   먼저 벽 위에 원하는 크기의 창을 그렸다. 면도칼로 코팅된 석고 보드를 힘주어 눌러 균열을 냈다. 앞뒤로 석고 보드를 떼어내니 나무 골조가 남았다. 톱질로 나무도 잘라냈다. 비닐로 막을 치고 작업을 했지만 어디로 새어나갔는지 온 집안이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썼다. 삽시간에 집안엔 소음과 먼지가 가득했다.    

   나무의 결을 그대로를 살리려고 연한 색 나무로 골랐다. 창틀을 짜고 테이블을 다는 일은 전문가의 손을 빌렸다. 마지막으로 투명 스테인을 칠했다. 테이블 아래 나무 스툴을 놓고 작은 등을 달으니 구색이 맞았다. 거실이 밝아진 건 물론이고 부엌일을 하면서도 가족과 쉽게 말을 건넬 수 있어서 좋다. 근심스런 얼굴로 엄마 아빠를 바라보던 딸들도 엄지를 척 올렸다.

   십여 년간 늘 생각만 해오던 일을 드디어 해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기대 이상이라 마음이 뿌듯했다. 그러나 일을 결단하는데 왜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를 생각한다. 오래도록 바라던 것을 현실로 이루려 할 때 불확실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반대가 있었다. 벽은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고 십여 년간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왔기에 그 위에 금을 긋고 더 깊게 눌러 자국을 낼 때 냉정하게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익숙함에는 중력처럼 내리누르는 힘이라도 있는 건지, 떨쳐내는 데 단호한 용기가 필요했다.

   기세가 완전히 역전된 순간이 왔다. 벽에서 떨어져나간 첫 조각으로 빛이 들이치는 모습을 본 순간이다. 그 후 나머지 벽을 부수는 손엔 힘이 더해졌다. 완성된 모양을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니 나머지 과정들은 점점 더 흥겨웠다. 집에 손님이라도 오면 자랑하고 싶어진다. 나 벽 뚫은 여자야!

   종종 오랜 익숙함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다. 늘 가던 길로만 가고 싶은 안일함이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꿈을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늘 주저할 때, 꿈은 현실로 깨어나지 못하고 선잠 속에서 서성이기를 계속한다. 변화를 원하면서도 변화가 가져올 번잡함과 불편함이 꺼려진다. 바라는 바가 있고 그것이 선한 일임에도 한 걸음도 떼지 않는다는 건 결국 바라지 않는 것이다.  

   조용한 저녁, 딸이 브렉퍼스트바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린다. 작은 등에서 빛이 내려와 딸을 은은히 감싸고 있다. 회색의 벽에 들어선 나무의 공간이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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