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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24. 2023

온돌과 호두알 같은

각인과 회기

   오랜만에 방문한 고국에서 버스를 탔다. 차창 밖 고향 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어떤 건물은 아주 사라졌고 어떤 건물은 현대식으로 증축했다. 없던 동네가 생기기도 했다. 그나마 어릴 적부터 단골로 드나들던 찐빵집과 재래시장 골목은 그대로였다. 이 도시에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직 남아있으니 위안이 됐다.  

   낡은 것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한국적인 것들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상점의 간판에 넘실거리는 영어가 부담스러웠다. 외국 상표는 물론이고 한국 회사 이름도 영어가 많았다. 이러다 영어 사용국의 사람들이 조만간 한국여행에 흥미를 잃게 되는 건 아닌지. 오랜 이국 생활에서 돌아온 내가 고국에서 바라는 것은 온몸을 녹이는 온돌과  손때 묻은 호두알처럼 정든 것이다.

   화요일 아침마다 주립대학 앞 교회에 영어공부를 하러 갔다. 전직 교사인 리노어가 교장 역할을 했고 영국출신 파멜라를 비롯한 몇 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어느 날 리노어가 모두 깜짝 놀랄 이야기를 꺼냈다. 리노어의 남편 존이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옛집을 다시 사고 싶다고 했단다.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어 겨우겨우 찾아낸 그 옛집에는 놀랍게도 리노어의 동료 교사인 파멜라가 살고 있었다.

   이제는 파멜라의 집이 된 그 집은 발라드 바닷가  고택이다.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오이 샌드위치 맛을 보기도 전에,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녀가 영국 출신이라는 것을. 그녀가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담한 정원,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를 재현한 집과 그 집에 잘 어울리는 고가구였다.

   파멜라는 존에게 개축 전의 낡은 사진들, 집의 족보를 모두 보여주었다. 집의 족보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한 것으로 존은 숙제를 다 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나이 들어가며 따스했던 가족의 사랑이 깃든  집이 그리워진다는 점에 공감했다. 파멜라가 빅토리아 시대를 재현하는 것도, 존이 옛집을 찾는 것도 다 같은 이유일 것이다.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리움을 품은 사람에겐 기억이 유산이 될 테니.   

   심리학자가 어미인 줄 알고 졸졸 따라다니던 사진 속의 오리들. 오래전 심리학책에서 본 사진이다. 태어난 지 15분이 된 오리들은 눈앞에 무언가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을 때 그것을 어미로 받아들인다. 오리의 눈엔 박힌 ‘각인’(imprinting)본능이다. 어머니의 손맛이 나는 된장국에, 장작불 타는 냄새, 까치 소리에 나도 모르게 끌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혀와 눈, 코와 귀에 저장된 것으로 돌아가려는 ‘회귀’(homing)본능이다.  

   버스가 학교 후문 앞을 지나고 있었다. 오래 전 졸업식 날. 나는 학사모를 쓰고 뾰족구두를 신고 저기 저 후문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 거의 닿았을 때 정류장 바로 앞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전에 내게 편지로 고백했던  선배가 영화처럼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놀란 나는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물었고 그는 “너 보러 왔지!”라고 답했다. 당황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는 그 아련한 기억의 장소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고 고개를 돌려 버스 정류장 쪽, 가게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 자리엔 너무나 낯익은 것, ‘STARBUCKS’라는 커다란 글자가 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애틀에 사는 내가 돌아온 고국에서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머리에 꽃 꽂은 여자처럼, 자꾸 헛웃음이 났다. 커피 물이 뚝뚝 떨어져 수채화 같은 기억을 지우며 버스는 서둘러 달아났다.

   한 달 만에 돌아온 시애틀은 여전히 비다. 와이퍼가 부지런히 빗물을 밀어낸다.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우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동네 스타벅스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벽난로 앞에 앉고 싶은 으슬으슬한 저녁이다. 언젠가 저 벽난로가 이 마을에서 자란 내 아이들을 부르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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