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주책

by 모든 햇살

아이는 말수가 적고 마음이 고왔다. 두세 번 배가 아프다고 해서 양호실에서 약을 타 먹였다.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단을 받도록 신신당부를 했지만, 며칠 뒤 아이는 다시 배가 아파 울상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 갔었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저었다. 한참을 내 잔소리에 귀 기울이더니 아이는 어려운 말을 어쩔 수 없이 꺼냈다. 엄마도 팔이 많이 아프셔요. 병원에 한 번도 못 가셨는데. 눈치 없는 나는 그제야 아이가 병원에 갈 수 없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어려운 살림이라는 것이 아이로 하여금 아픔을 참아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하다니. 시간이 다급하여 그날 바로 부모님을 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사는 동네는 버스가 비포장 시골 길로 한참을 들어가는 작은 마을, 게다가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주변에 집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니 하얀 메밀꽃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아이의 소박한 집과 처마 밑에 가지런히 기대어 놓은 땔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밭일 나가신 부모님을 기다리며 마루 끝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마침내 아이의 아버님께서 하루의 긴 노동에 지친 어깨에 지게를 메시고 메밀밭 끝자락에 들어서셨다. 지게 너머로 붉은 저녁노을이 파스텔화처럼 펼쳐지고 노을빛에 물든 메밀꽃들이 환상적인 색들의 잔치로 너울거렸다. 나는 그만 아버님께 인사드리는 것도 잊고 눈앞에 펼쳐진 명화에 넋이 나가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정신을 추슬러 갑자기 방문한 용건을 말씀드리고 서둘러 시골 버스를 잡아타러 언덕을 내려왔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그 명장면이 새록새록 자꾸 떠올랐다. 일생에 다시보기 어려운 그림인데 카메라를 가져왔더라면 좋았을 걸. 그러다 갑자기 밀려드는 죄송한 마음. 주책없는 내 마음을 책망이라도 하듯 시골 막차가 어지럽도록 덜컹거렸다.

처자를 병원에 데려가기가 쉽지 않은 분의 힘겨운 노동은 그분의 메밀밭으로 보상받으셔야 당연하지 않은가. 그 순간 얼마 전 배추 파동으로 농부들이 땀 흘려 키운 농작물들을 포기해야 했던 일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공짜로 배추를 얻을 수 있다고 신이 났었다. 갑자기 드러난 사람들의 이기심에 무척 당황했다. 어떤 이들의 고통이 다른 이들의 횡재가 될 수도 있다는 세상살이의 씁쓸함. 그리고 오늘, 아이 아버님의 성스러운 노동의 장이 철없는 내게는 단지 아름다움으로만 보이다니. 이 시점에서 나의 감성은 명백한 사치가 아닌가.

지금은 벌써 아기 어머니 되었을 어느 제자는 편지 끝자락에 “선생님의 감성이 늘 부러웠어요.”라고 썼다. 그렇지만, 흔들리는 차 안에서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나의 감성이 부끄러웠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이모부님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모부님은 자연을 사랑하셨다. 계곡에 물놀이를 가실 때면 여기저기 남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까지 모두 치우시며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의 몰상식에 마음 아파하셨다. 어린 시절, 저녁상을 물린 여름밤이면 하얀 천을 벽에 거시고 슬라이드 쇼를 여셨다. 철컥철컥 슬라이드가 돌아가고 가끔 꼬마 관중의 손가락이나 다리가 긴 모기들이 화면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주연은 단연 고국의 산과, 나무와 꽃들이었다.

사촌들과 올망졸망 모여 앉아 감탄하며 바라보았던 그 형형색색의 자태에 감탄했다. 한 장씩 등장할 때마다 어디에 사는 누구라고 그 이름을 부르며 가르쳐 주셨다. 이모님 집 앞마당에는 온갖 색들의 장미들이 그리고 모퉁이마다 하얀 옥잠화 꽃이 피었다. 그 향기는 가난했던 날들의 시름을 잊게 해줄 만큼 싱그럽고 달콤했다.

지금 시애틀엔 또 한 번의 여름이 한창이다. 창 앞에 장미 몇 송이가 어설픈 공연을 마쳤고 옥잠화 꽃대가 올라오고 있다. 내게 그들은 어릴 적 이모님 댁에 그윽했던 여름향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먹을거리가 절박했던 시절에도 채소가 아닌 꽃을 심으셔야 했던 그분의 살아가는 법을 생각한다. 모두에게 다 이해받지는 못하셨겠지만 내 어린 시절을 풍요롭게 가꾸어주신 그분의 감성을 나로서는 감히 허물로 여길 수 없다.

이모부님과의 추억은 그 시절의 아이들이 누리기 어려웠던 정서적 호강이었다. 이모부님은 자연을 담은 사진들을 책으로 엮어 가족과 친지들에게 선물하고 떠나셨다. 내게 주신 책 위엔 내 이름 세자, 그리고 그 아래에‘귀하’라고 쓰셨다. 소중한 것을 받아든 내 손이 송구했다. 나의 감성의 부분적 책임을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려 드린다. 이모부님의 삶을 들어 주책없는 나를 변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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