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주차장을 지날 때 엄마 생각이 난다. 지난 가을 시애틀에 오셨을 때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동네라 답답해하셨다. 이웃집 할머니의 권유로 환승주차장으로 도토리를 주우러 가셨나 보다. 어느 날 나도 장바구니를 들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주차장과 그 옆 조그만 예배당 사이에 참나무들이 담장 대신 줄지어 서있었다. 떨어진 나뭇잎들 사이로 오동통한 도토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어릴적 엄마와 냉이 캐러 갔던 날처럼 바구니에 차오르는 도토리를 보며 아이처럼 즐거웠다. 딸네 집에 다니러 오셔서 제일 재미나게 하신 일이 고작 도토리 줍는 일이었다. 바쁜 딸 덕에 종일 집에서 책을 읽으며 홀로 지낸 날들이 죄송했다.
햇살 아래 도토리들이 잘 마르고 있는지 유리문 밖으로 베란다를 내다보았다. 얄미운 다람쥐 한 마리가 큼지막한 도토리 하나를 들고 오물거리며 식사를 즐겼다. 다람쥐 녀석의 도토리 껍질을 벗기는 솜씨에 감탄하며 “원래 녀석들 몫의 양식이 맞는가보다.” 하고 혼잣말을 했다. 내 양식은 그로서리에 그득하지 않은가. 다람쥐랑 명분 없는 밥그릇 싸움대신, 요 며칠만 먹지 말아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할 모양새다.
딸이 넷인데도 엄마는 우리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시집가면 평생 할 일을 벌써 할 필요 있냐는 듯. 아직 품 안에 있을 동안에는 본인이 며느리, 아내, 어머니로서 해왔던 노동으로부터 딸들을 보호하고 싶으셨나 보다. 엄마의 요리 솜씨 덕에 우리 집은 종종 친척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는 장소가 되곤 했다. 그래도 엄마는 딸들에게 요리법을 즐겨 가르치시지는 않으셨다. 자기 입에 들어가는 음식인데 맛없으면 자기 손해지. 이다음에 다 잘 만들어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아마도 딸들은 엄마와는 조금 다르게 살아주길 바라셨는지도 모른다.
엄마와는 달리 나에게 요리는 해야하는 일이지, 즐기는 일은 아니다. 분주하게 살아왔던 시절의 버릇인지. 가족의 식탁을 위해 더 맛난 요리보다는 더 손쉬운 요리를 택한다. 지난가을, 남편이 잡아 온 연어 한 마리가 싱크대가 좁다고 누워있는데 녀석의 부릅뜬 눈을 피해 곁눈질하다 결국엔 손질을 포기하고 말았다. 엄마께 말씀드렸더니 자식을 먹이는 일인데 그걸 못하느냐고 하신다. 엄마는 엄마라서 용감하신데 나는 엄마라도 못하는 일이 많다.
엄마는 껍질을 정성껏 벗긴 도토리를 믹서로 곱게 갈아 놓으셨다. 우러난 검은 물을 몇 차례 뺀 후에 올이 촘촘한 보자기에 넣고 짜내어 찌꺼기를 걸러내시고 나서 탱탱한 연갈색의 도토리묵 몇 덩이를 만드셨다. 잘 썰어서 양념장을 얹었다. 며칠째 계속된 노동의 결실임을 생각하니 황송하여 “잘 먹겠습니다!”라고 크게 외치고 도토리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첫 맛. 고소하고 쌉싸름한 끝 맛의 마무리가 환상이다. 얼마나 많은 땀과 시간을 들인 음식인가. 마치 그 가볍지 않은 맛이 자식을 위해 힘에 겨운 노동도 겁내지 않으시는 엄마의 마음과 같다.
파크앤라이드를 지날 때, 도토리나무에 연둣빛 작은 잎들이 돋아날 때, 그 잎들이 알록달록 가을빛으로 물들 때, 그리고 흰눈이 가지를 덮을 때도 엄마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