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가을이 왔다. 아침 이슬 맺힌 잔디 위에 사과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운다. 햇볕에 얼굴 그을린 사과 알이 빨갛게 익어간다. 이 집에 이사 온 이후 벌써 15년이 되어간다. 집을 지을 때 심은 듯한 나무 몇 그루는 반백을 넘었다. 삼월의 문을 여는 벚나무, 사월을 여는 사과나무 그리고 오월 하늘에 하얗게 꽃잎을 띄우는 산딸나무다.
사과나무에 약을 치지 않으니 발 빠른 벌레들을 막을 수 없다. 그들이 먹은 부분을 도려내고 몇 입 물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나무는 중앙의 큰 기둥에 큰 상처가 있음에도 비료를 준 적이 없는 무심한 주인에게 투정도 없이 해마다 제가 감당할 만큼의 열매를 내어놓는다. 이 나무엔 열매보다 더 중요한 쓰임새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푸른 그늘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나무는 넉넉한 품으로 사람들을 부른다. 함께 애찬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기 알맞은 그늘이다.
나무에 걸어놓은 새집엔 작은 새들이 둥지를 짓는다. 5월, 해먹 위에 누워 귀를 기울이면 알에서 깨어난 새끼 새들의 지저귐이 들린다. 튼실한 가지에 해먹을 걸면 아이들이 해먹을 타며 깔깔댄다. 딱따구리나 스텔라제이가 와서 벌레를 잡아먹기도 한다. 가지가 유난히 흔들릴 때는 다람쥐가 온 것이다. 다람쥐가 한 입 가득 사과를 물고 돌려 깎기 재주를 보여준다. 사과나무엔 이런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가 깃든다.
시애틀에 온지 5년 만에 휴직하고 있던 직장에 사직서를 냈다. 퇴직금이 온 후, 우리에게 적당한 집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남편은 전날 보아두었던 집을 보러 나갔다가 찾지 못해 허탕을 쳤다. 길눈이 밝은데 어찌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덕을 내려오다 집을 내놓는 간판을 내 건지 몇 분 되지 않은 집을 보았다. 오래된 골목에 있었고 무엇보다 이 동네에서 가장 값이 쌌다. 게다가 주인이 모두 손을 본 집이라 고칠 데가 없었다. 그날로 당장 오퍼를 넣었다.
다음날 아침 이웃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 찾고 계시죠? 제가 오늘 산책하다가 집을 하나 봤는데 거기 좀 가보세요. 그 집은 다름 아닌 어제 우리가 오퍼를 넣은 집이었다. 사방에서 돕는 손길들이 함께 연합하여 집은 선물처럼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맘껏 드나들고 악기를 두드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공간이 필요했다. 집은 정확히 그 조건에 맞았다.
처음 시애틀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대낮에도 전기를 켜고 지내야할 만큼 어두웠다. 그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 3월부터 기다린 봄이 5월이 돼서야 도착했다. 어깨는 으슬으슬 춥고 공기는 낯설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빛이라고 신음처럼 고백했다. 하루 종일 빛이 잘 드는 곳. 이것이 이사할 집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이 집의 가장 좋은 부분은 집이 아니라 마당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집의 정남향 마당에는 하루 종일 해가 든다. 마음 따뜻한 분들이 유실수와 꽃들을 나누어주셔서 마당은 점점 풍성해졌다. 고맙게도 잘 자라주어 주신 분들도 함께 기뻐하셨다.
이 마당엔 또 하나의 놀라운 복이 있다. 처음 심어보는 씨앗들이 열매를 맺는데 오이를 하루에 20개씩 땄다. 가을무를 세 개를 뽑아 이웃에게 드렸는데 집 까지 들고 가기 팔이 아팠다고 하셨다. 농사를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이 풍성한 수확이 일상이거니 여겼다. 그런데 이웃집에 가보고 알았다. 흙 속엔 온통 주먹만한 돌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작물이 뿌리를 깊이 내리기 어려웠다. 그제야 밭의 모양을 눈여겨보았다. 집은 언덕에 놓여 있기에 마당이 수평일 수가 없는데, 전 주인이 축대를 쌓고 흙을 사다 뿌리고 마당을 수평으로 맞춘 후에 그 곳에 텃밭을 만든 것이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밭이 이 집과 함께 덤으로 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네가 심지 않은 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리라.” 이 약속은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은 약속이다. 마당의 열매를 거두며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샘솟을 때 귀에 울리는 말이다. 삶에는 노력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임금이거나 보상이다. 그러나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자격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질 때 그것은 은혜다. 잘 익은 무화과와 사과 한 바구니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켄모어의 모든 햇살을 가득 담은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