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하얀 벽에 걸린 사진 몇 장이 손이라도 달린 듯이 눈을 끌어당겨서 뒷걸음질 쳤다. 어쩐지 낯이 익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도 가끔 찾는 공원의 풍경이었다. 그 중 하나는 계단 위에 쌓인 붉은 단풍인데 내 사진첩 속에 들어있는 한 장의 사진과 흡사했다. 그 옆에 ‘닥터 라슨'이라는 이름표와 연도가 수줍은 듯이 붙어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사물에 대해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 그리고 그 사진과의 의외의 만남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찍는 병에 걸린 의사 선생님이네, 같은 병 환자로서 반가워 히죽 웃었다. 내게도 그 해 가을은 그 사진 만큼이나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울긋불긋 나뭇잎들이 물들기 시작하면 시애틀의 우기가 시작된다. 그리 굵지 않은 빗방울들이 쉼 없이 고운 잎들을 두드려 대기 시작하면 곧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 땅바닥에 코를 박은 젖은 가을 잎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다 보면 어느덧 길고 긴 겨울이다. 시애틀 특유의 오싹 거리는 추위가 수선화와 튤립이 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해엔 어찌 된 일인지 우기가 늦게 찾아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모처럼의 가을 햇살을 하루하루 즐기고 있었다. 수목원에 갔더니 아직 얼굴이 앳된 젊은 부부들이 수북이 쌓인 가을 잎 속에 목을 겨우 가누는 아기를 앉혀놓고 잎들을 뿌려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 동네 공원 입구에서도 아이들이 손바닥 같은 빨간 단풍잎으로 눈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예쁜 길이 그곳에 있었나 싶었다.
어느 날 아침 카메라를 들고 섬세한 동양단풍을 볼 수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아직 코끝이 빨개지는 이른 아침인데 모퉁이마다 마주치는 카메라를 든 낯선 사람들. 눈웃음으로 “기회를 알아보시네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돌계단 아래 이르렀을 때 몇몇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하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나도 감히 밟고 올라가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검은 돌계단 위로 쌓인 붉은 단풍의 선명한 대조에 사람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찬 아침 공기를 타고 한두 장의 잎들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찍은 가을 사진들을 모아 동네 편의점에 갔다. 현상 된 사진을 내주던 점원 아가씨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자꾸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녀의 진한 눈썹, 커다란 눈이 이름표가 달린 파란 유니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말문을 열더니 “시애틀에 당신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니 깊은 한숨을 쉰다. 맥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민 와서 영어를 배우느라 학창시절을 힘겹게 보냈다며, “친구가 전부인 나이잖아요?”하고 동의를 구했다. 문뜩 친구들과 밤새워 재잘거리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영어도 많이 불편하지 않은 사회 초년생이 되었지만, 지금 아가씨의 간절한 소원은‘모국어로 밤새 수다를 떠는 것’이라고 했다. 잘생긴 남자친구나 돈도 아니고 단지 마음껏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많이 외로웠나 보다. 낯선 동양인 아줌마에게 불쑥 마음을 열만큼. 축 처진 어깨에 커다란 눈에선 눈물이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위로가 되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내 손에 있는 것이라곤 그저 제 흥에 겨워 찍어 댄 사진들뿐. 나는 얼른 그중에 제일 맘에 드는 사진 몇 장을 골라 그녀의 손에 얹어 주었다. 가을 선물이에요. 마음 같아선 꼭 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 아가씨의 문화도 잘 모르고 해서 손등만 두드려 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하는데 사진 몇 장으로 위로하기엔 턱도 없었던지 얼굴엔 다시 슬픔이 번진다. 가게 문을 열고 나섰다. 그녀의 아픈 마음이 전염된 건지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그냥 볼에 닿은 쓸쓸한 바람 때문이었다고 우기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댔다. 다들 외로운 사람들.
여러 해가 지난 지금, 닥터 라슨의 붉은 단풍은 병원 복도에서 그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을 정취에 젖어드는 즐거움을 주고 있을까? 내 것은 낡은 사진첩 속에서 가끔 빛 구경을 한다. 그리고 다른 한 장은 그 편의점 아가씨가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지, 눈물 두어 방울에 얼룩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토요일 아침, 한글학교에 갔다. 그날따라 눈 비비며 들어서는 우리 반 꼬맹이들이 사랑스럽고 내가 속한 작은 커뮤니티가 마냥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