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에서 ‘밀란 쿤테라’의 ‘농담’을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었다.
“이 마지막 얼굴이 진짜였을까? 아니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 위선자들처럼 내게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빠르던 느리던 사람들은 모두 '나는 누군인가'라는 질문에서 도망칠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누군인지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마치 경력있는 신입을 구하는 말인듯하여 나에게는 그래서 나를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지 아리송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나를 찾아가는건 나에 대해서 공부해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되며 새로운 사람의 성향을 파악해나가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새로운 단어들을 외워나가는 과정이 필수적인 것처럼 우리에게는 나를 배우는 나에게 대해서 잘 모르는 미숙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기간동안 자연스럽게 우리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모방하며 행동을 형성해나가고 학습해나간다. 하지만 이런 학습은 성인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계속해서 내가 닮고 싶은 누군가, 내가 되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사람을 모방해나가며 후회와 만족감을 느껴나가며 하나하나 나 자신의 색을 찾아나간다.(개인적으로는 가끔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하는 반면교사들도 우리의 행동형성에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젊음은 젊은이들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조지 버나드 쇼의 유명한 말을 들어본적이 있는가? 흔하게 젊은이들이 젋음의 가치를 몰라서 낭비한다는 의미로 사용이 되고는 하는데 나는 이 문구를 볼때마다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어진다. 젊음이라는 것이 그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나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 한다지만 누구나 미숙했던 출발점이 있고 그건 내 안에 남아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단절되어 있지 않고 과거가 곧 현재를 만들어나간다. 해피엔딩보다 세드엔딩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처럼 실수투성이였던 그 시절이 나에게 더 가치 있어 보이는 건 내 미숙함 때문이 아닐까?
젊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은 수수께끼 같고 나는 점점 세월과 함께 경험치들을 쌓으며 이 수수께끼들을 풀어나가는 탐정이 된다.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들이 이어지며 내 인생의 점들이 선으로 변해간다. 지나가봐야 보이는 아름다움이 있고 겪어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 굴러봐도 괜찮다. 진흙탕을 구르면 머드팩을 한듯이 피부 미용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진흙탕을 구른 사람만이 진흙탕을 구룬 사람의 슬픔을 안다. 혹시 아는가 진흙탕을 구른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당신이 희망을 줄 수 있을지. 그리고 진흙탕을 구르며 느낀 것들이 당신에게 있어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될지. 상황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발생하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당신이 선택한다. 인생의 모든 것은 당신이 만들어 나가는 스토리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