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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손 Nov 02. 2022

자작나무 돼지가족

작은 가지목으로 소품 만들기

넓은 판재가 필요한 가구를 만들 것이 아니라면 우리 주변에 목공 재료로 쓸 수 있는 목재는 무궁무진하다.


가지치기한 가로수가 좋은 예이다. 우리나라 가로수는 대부분 벚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인데 벚나무와 느티나무는 목질이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워서 만들기 재료로 훌륭하다. 은행나무는 상대적으로 물러서 가공성이 좋아 조각이나 서각 재료로 많이 사용하는데 '구린내(은행냄새)'가 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나무향이 스스로 맺는 열매의 냄새를 닮은 것이 당연한 듯 하지만 신기한 사실이다.


등산로 주변의 간벌목, 바람에 꺽인 나무도 좋은 재료다. 

산에서 자란 나무는 가로수와 달리 빽빽한 나무 틈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자란다. 

아름드리 먼저 자리 잡은 큰 나무가 아래로 흘려주는 몇 조각의 해를 받으려고 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지거나 마음대로 구부러지기도 한다. 그런 나무의 몸부림은 인간에게 아름다움으로 각색되어 그 자체로 오브제가 되기도 한다.


사실상 부족한 것은 아이디어와 창의력이지 재료가 아니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는 자작나무이다. 자작나무는 비교적 반듯하게 자라고 수피가 흰색이어서 쉽게 눈에 띈다. 목질도 적당히 단단해서 가공하기도 좋다. 불에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탄다고 해서 자작나무라고 한다는데 어디서도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강원도 인제 원대리에 자작나무 숲이 있는데 등산로를 따라 고개를 몇 번 넘으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자작나무 군락지는 눈이 시리게 감동적이다. 눈이 쌓인 겨울에는 배경과 나무가 하나 되는 즐거운 시각적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살았던 아파트의 조경수가 자작나무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조경수를 바꾼다고 어느 날 자작나무를 베어 아파트 한쪽에 수북이 쌓아놓았다. 계속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주말에 딸아이를 대동하고 톱을 들고 자작나무 더미로 갔다.

딸아이를 데려간 것은 혼자 거기서 톱질을 하는 것이 왠지 쑥스러워서 아이와 톱질하고 노는 좋은 아빠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딸아이에게도 더없이 즐거운 놀이였을 것이다...


무엇을 만들 계획 없이 일단 더 희고 깨끗한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토막을 만들어 가져왔다. 생각 끝에 돼지를 만들었는데 오랜 기억이지만 아마 어느 잡지에서 보고 영감을 얻었던 것 같다.


크기 순서로 아빠는 제일 큰 것으로 하고 그다음이 엄마, 아들, 딸 순이다. 코의 특성만 강조한 캐리커쳐 같은 디자인으로 톱과 칼, 그리고 드릴로 아주 간단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른바 자작나무 돼지가족이다.


화'돈'점정이라 해야하나. 칼로 대충 깍은 나무토막에 연필로 초승달 같은 눈과 입만 그려줘도 나무돼지들이 금방이라도 웃고 조잘거릴 것 같다. 딸은 엄마 돼지 입에 립스틱을 발라 주었다.


그렇게 우연히 주은 자작나무로 우연히 만든 돼지가족은 우리 집에서 제일 잘 보이는 콘솔테이블 위에 자리 잡았고 잦은 이사에도 언제나 가장 잘 보이는 곳의 주인공이 되었다. 

언제인가 아들 돼지의 다리와 귀가 하나씩 빠져 없어져서 작은 나사를 대신 박아 넣고 흡사 로봇같이 보여 싸이보그 돼지가족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아이들이 한 해 한 해 자라는 동안 돼지 아이들은 그대로였다

애초에 몸집의 크기 순서로 아빠, 엄마 이름을 붙여준 것인데, 이제 크기로만 보면 순서를 바꿀 때가 훨씬 지났다. 아들의 키가 아빠를 넘어서자 딸도 경쟁하듯 엄마를 넘어섰다. 

크기에 따라 이름을 바꿔야 하나 잠시 생각했는데 제 아무리 아이들이 커도 저기서 제일 큰 돼지 두 마리는 여전히 아빠와 엄마로 남기로 했다.


아이들이 아무리 커도 나는 여전히 에 안을 수 있을 것 같다.




P.S. 혹시 '돼지'라는 이름에 오해를 받을까 불편해 할 수 있는 우리 집 두 여자를 위해 사족 하나 붙인다.

사실 우리 가족의 몸매는 돼지보다는 멸치 쪽이다.






자작나무로 기둥을 만든 선반


자작나무 잔 가지를 사용한 오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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