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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차타 음악_2편. 도미니칸 바차타 (탄생과 수난기)

by 김주영

1. 차별 속에서 탄생한 도미니칸 로맨틱 볼레로​

바차타는 도미니카 공화국(Dominican Repulic)에서 20세기 초에 탄생하였고, 기타를 기반으로 하는 로맨틱 볼레로 스타일로서 쿠바의 손 음악(Son Cubano)과 볼레로(Bolero)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쿠바 동부지역에서 발생한 손(Son) 음악은 시간이 흐르며 쿠바의 서부지역인 하바나까지 전파되어 1920~1930년대는 쿠바 손 음악의 황금기였습니다. 볼레로는 쿠바 동부지역에서 생겨난 '뜨로바'(Trova)라고 하는 더 오래된 음악장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사랑을 주제로 하는 느린 템포의 음악입니다. 쿠바 손 음악과 쿠바 볼레로는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그 나라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시골지역에서 초기 바차타의 형태가 연주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쿠바의 음악환경과는 다르게 초기 바차타 음악과 관련한 녹음된 음악과 영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뜨루히요'(Trujillo)라는 독재자가 30년 동안 정권을 잡은 기간인 1930~1960년대초에는 검열을 통과한 음악만이 정부 방송국에서 녹음되고 라디오나 TV를 통해 방송되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바차타는 시골지역에서 음악적 교육을 받지 못한 연주자들이 연주하였고 가사내용도 세속적인 점 등으로 미루어 보면, 독재정부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독재정권의 검열 시스템에서는 초기 바차타 음악은 라디오나 TV등의 대중매체를 탈 수가 없었고 야외 무대, 술집 등에서 라이브 공연의 형태로 노래와 연주가 가능했습니다.


초기 바차타는 이렇게 30년 넘는 숨막히는 독재정치 하에서 탄생하여 라이브 연주를 통해 도미니칸 민중들과 직접 호흡을 하면서 살아 남았습니다. 악기적 구성으로는 스페니쉬 기타(Spanish guitar), 아코디언, 마라카스(Maracas), 땀보라(Tambora) 등이었을 것이며, 초기 바차타는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게 볼레로 음악의 느낌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2. 도미니카 음악산업의 탄생과 바차타 음악의 녹음의 시작(1960년대)​

30년 동안 독재정치는 독재자인 뜨루히요가 암살됨으로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인 1962년에 도미니카 음악산업이 태동하면서 처음으로 바차타 음악들이 녹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2년에 최초로 녹음된 바차타 곡은 '호세 마누엘 깔데론'(José Manuel Calderón)의 '보라쵸 데 아모르'(Borracho de Amor, 사랑에 취한)이었으며, 도미니카 정부의 라디오, TV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습니다. 당시 원곡을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https://youtu.be/epX9fDiasTw


음악을 들어 보신 후에 들었던 느낌이 '지금의 바차타와는 전혀 다르구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멕시코 볼레로 음악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1960년대 초기는 멕시코의 볼레로가 다른 나라에도 인기였을 시기이므로 그 이유를 짐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듯이, 1960년대 초는 도미니카 공화국에 음악산업이 탄생하여 바차타 음악이 녹음되어 도미니카인들의 구미를 사로 잡았지만, 당시는 라틴아메리카에 보편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볼레로 음악의 변형된 형태로 간주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여러 다른 가수들이 녹음에 참여하면서 바차타 음악에 대한 녹음의 봇물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가수들의 노래도 들어 보겠습니다.


1963년에 나온 '라파엘 엔까르나시온'(Rafael Encarnacion)의 '무에로 꼰띠고'(Muero Contigo)입니다.

https://youtu.be/dVLqi3iPmSI

이전의 곡보다는 상대적으로 지금의 바차타에 약간 가까워진 느낌이 들긴 합니다. 이 곡을 들어 보면, 지금의 바차타 곡들도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차타 음악에서 보편적인 'I-VI-II-V-I'의 코드 진행을 보이고 있으며, 이 코드진행은 3번째 및 4번째 박자에 강조가 주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특징은 볼레로 곡에서도 찾을 수가 있습니다.


3. 바차타 음악의 수난 시기(1970년대)

앞에서 설명해 드린 것과 같이, 30년 동안의 독재정치가 끝나고 검열제도가 없어진 후 1962년에 첫 바차타 곡이 녹음이 된 이후로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바차타 음악들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게 되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도미니카 엘리트 층은 바차타 음악과 춤은 저속하고 성적인 면을 띠고 있어서 문화를 퇴보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음악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브랜드화를 하려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TV, 라디오, 신문 등에서 이 음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상류사회의 연회에서는 바차테로(바차타 가수)가 노래와 연주하는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뮤지션들은 가난한 지역의 술집이나 사창가 등에서 노래와 연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시기였습니다. 음악은 그 배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섹스, 절망, 범죄에 관한 내용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바차타 음악을 금지하고자 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에게 더 명분을 줄 수가 있었습니다.


1962년에 도미니카에서 처음으로 바차타 곡을 녹음한 '호세 마누엘 깔데론'은 1967년에 뉴욕으로 가서 활동을 하고 5년 후에 귀국을 하였는데, 도미니카를 떠나기 전과는 바차타 음악의 환경이 완전히 변화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차타 가수들의 입지가 좁아졌고, 바차타 장르는 빈곤, 범죄, 매춘과 연상이 되었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라디오 과라치따'(Radio Guarachita)라는 방송국에서만 바차타 음악을 방송하고 있는 열악한 환경으로 변화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현실에 실망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가 버렸습니다. 바차타 곡이 차지할 수 없는 공연무대, 방송 등을 메렝게 음악이 중요한 대중음악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메렝게 오케스트라 뮤지션들이 공식적인 대중음악산업에서 많은 이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바차타 음악가들은 때로는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며 돈을 벌기도 했지만,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대중들과 직접 호흡하면서 계속 바차타 음악을 들려 주고 있었습니다. 뮤지션들 대다수가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가사의 내용 또한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을 다루고 있었지만, 바차타 음악 특유의 그루브와 사랑에 대한 진솔한 감정을 담은 발라드적 감수성은 도미니카 국민들의 인기를 계속 얻어 가게 되었습니다. 비공식적인 통계상으로 생각한다면, 어느 시점부터 메렝게의 인기를 앞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가수의 곡들을 들어 보고 다음으로 넘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970~198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마리노 뻬레스'(Marino Perez)입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지금까지 바차타 가수 중에 최고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뮤지션입니다. 자신의 슬프고 고된 삶이 직접 담겨진 곡을 작곡하여서 Bitter Bachata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https://youtu.be/zgf3KbOrKAI


다음은 1976년에 나온 '레오나르도 파니아과'(Leonardo Paniagua)의 '미 세끄레또'(Mi Secreto)입니다. 이 가수는 감미로운 음색으로 바차타 음악의 당시 주요한 청중이었던 노동자 계층을 넘어서서 폭넓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차타 음악이 이제는 사회 엘리트들이 억누르는 단계를 벗어나서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전국민적 음악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암튼 이 가수는 1970~1980년대에 앨범이 가장 많이 팔린 가수들 중 한 명이었고, 지금도 투어를 돌며 활동 중입니다.

https://youtu.be/Q17nuPbm7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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