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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Dec 27. 2023

시래기꽃

자존

시골에서 가져온 무는 무청째로다.

뻣뻣이 살아 춤추는 생명 줄거리. 무청을 버릴라치면 그 튼튼한 육체미에도 묘한 연민이 드는 건 나만이 아닐 테지. 바로 찌개 끓여 먹을 건 집에서 제일 큰 웍에 이것의 사지를 욱여넣어 가며 금방 데쳐놓고, 나머지는 두고 먹으려고 작년부터 이렇게 말리고 있다.


먹을 게 귀하던 옛날에는 겨울철에 얼마나 고마운 음식이었겠나마는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냉동실에 들어가면 생각보다 잊어 먹길래 올해는 조금만 말려 보았다. 시골이건 도시건 어디라도 시래기 마르는 풍경의 정겨움은 한 가지다.


한 녀석은 판타롱 바지를 입고 엘비스 프레슬리 한다.


시골 배추 겉잎도 함부로 안 버리고 데쳐서 들기름, 된장 넣고 자작자작 버무리거나 냉동실에 넣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된장이랑 두부 넣고 심심히 끓이면, 요리 못하는 내 음식이라도 대략 요란한 황홀을 경험한다. 그것이 다 자연에서 곰삭아 자기 때를 만난 배추가 가진 미덕 때문이지 내 실력과 무관임을 잘 안다.


"아이고, 이쁘다. 이것도 이래 이쁘네. 거참. "

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뭘 보고 저러는지 거실에서 한참을 감탄하는 소리가 다.

'내가 새로 꽂은 꽃이 있었나, 아닌데. 최근에 그린 그림도 어제 다 보여줬는데?'

싶어 궁금해서 나가보니 잘 마른 시래기를 이젠 넣어야겠다 싶어 소쿠리에 담아 이렇게 둔 걸 보고, 앓는 듯이 예뻐하고 있는 거다.



"맞제, 예쁘제. 생활 구석구석 운치라 칠 게 찾아보면 참 많다니까. 예쁜 게 너무 많아요."

맞장구를 치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머머 어머머머, 물기를 쪼옥 잃은 시래기인데 꽃이 피어 있다. 흑백의 양귀비라 해도 되겠구나 여기는 건 내 호들갑일까.




잘났건 못났건 제 생을 다해 살아내고 어떤 쓰임에 바쳐지는 것들은 다 저렇게 나름의 꽃을 피우는 모양이다. 그리 잘나지 않은 내 인생도 어떤 꽃 하나는 피울 수 있겠다는 겸허한 자존을 얻고 가는 늦가을 전경이다.









지난해 늦가을 썼다. 올해는 시골 무청을 얻지 못했다. 농사도 해거리를 한다고 하고 복직으로 바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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