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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 Nov 30. 2022

교과서 편집자 T의 평화로운 하루

‘뭐 하는 분이세요?’라는 질문의 쓸데없이 상세한 답변

아침. 지하철을 탄다. 탄 문의 반대쪽 문에 최대한 가까이 붙는다. 기둥 근처가 비어 있다면 기대어 선다. 정신을 차리면 환승 통로를 걷고 있다. 어떤 경위로 여기에 와 있는지 생각한다. 기억이 안 난다. 발이 이끄는 대로 다시 지하철을 타고, 내리고, 걷고, 정신을 차려 보면 나는 커피 한 잔과 함께 사무실에 와 있다. 컴퓨터를 켜고 회사 사이트 관리자 페이지에 접속한다. 1:1 문의 게시판에 내가 담당한 책의 내용 문의가 올라왔는지 살핀다. 문의가 있다면 답변을 달아야 한다. 그것이 오탈자나 내용 오류에 대한 지적이라면 정중한 사과도 덧붙여서. 다행히 아무런 글이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창을 끄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교정지를 가져와 펼친다. 교과서 개발 시즌이 아닐 때는 주로 문제집을 편집한다. 종이 위에 펼쳐진 글을 읽고, 연필을 끄적이며 문제를 풀고, 빨간색 수성펜으로 수정할 곳을 표시한다. 졸음이 쏟아지면 커피 한 모금. 교과서의 내용을 확인하거나, 이전에 만든 문제집을 찾아보거나, 다른 출판사의 문제집을 뒤적이다 보면 책상에 빈 곳이 점점 줄어 간다. 잠깐, 지우개가 어디 갔지? 책과 종이의 틈바구니에 숨어버린 지우개를, 형광펜을, 수정 테이프를 찾느라 책상을 한번 헤짚는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데스크 오거나이저라는 걸 사 볼까? 책상을 둘러보며 그것을 놓을 곳을 물색한다. 없다. 다시 눈을 교정지로 돌린다. 점심은 뭐 먹지.


점심. 그것이 문제다. 김치찌개-돈까스-칼국수-순두부찌개-순댓국으로 이어지는 루틴을 벗어나고 싶다. 오늘은 몇 명이죠? 여덟 명? 김치찌개 가시죠. 같이 밥을 먹는 일원들이 모두 앉을 수 있는 식당이 별로 없다. 구내식당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의미 없는 말을 읊조려 본다.


오후. 커피를 또 한 잔 들고 와 자리에 앉는다. 문제집의 본문과 맞추어 해설을 보기 시작한다. 답이 잘 맞는지 연필로 동그라미를 쳐 가며 확인한다. 글을 읽는다. 아까 고쳤던 문제의 해설을 제대로 고쳤는지 확인한다. 깜빡하고 놓친 부분이 있어서 다시 고친다. 글을 읽는다. 이상한데? 이번 문제집의 원고를 쓴 건 나. 앞서 교정을 본 것도 나. 모든 것은 내 잘못. 탓할 사람은 없다. 커피를 한 모금. 그새 식었다. 빨간 글자를 잔뜩 써 내려가다가 안 되겠다 싶어, ‘파일 참고’라고 쓰고 한글 새 문서를 열어 몇 줄을 타이핑한다. 파일을 서버에 올려 두면 조판 담당자가 복사해서 붙여 넣어 줄 것이다. 메신저 알림이 뜬다. 고객센터입니다. OO 교과서 00쪽 내용 문의가 인입되어 전달드립니다. 연락처 010-0000-0000. 내가 담당한 과목이다. 문의 요청은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게 원칙이므로 바로 전화를 걸어야 한다. 부끄럽지만 10년 넘게 일해도 전화 통화는 무섭다. 교과서를 꺼내어 페이지를 확인하고 무엇 때문에 문의가 들어왔는지 예상해 본다. 오류가 나올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건다. 평소에는 전혀 쓰지 않는 외부 업무용 발성으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OO출판사 과학팀입니다. OO 교과서 문의 건으로 전화드렸는데요. 다행히 평범한 내용 문의라 별 일 없이 통화를 마친다. 다시 시선을 교정지로 돌린다. 어디까지 했지? 커피를... 다 마신 지 오래다. 마지막으로 본 문제를 찾아낸다. 글을 읽는다....


저녁. 퇴근해도 되지만 조금 고민이 된다. 한 시간 정도 더 일하면 교정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집에 가고 싶다. 머릿속에서 칼퇴근 협상을 시작한다. 나는 여덟 시에 출근하지만 조판소는 아홉 시 넘어 출근하니까, 오늘 다 끝내고 보내나 내일로 미루나 어차피 진행 속도는 똑같잖아. 여기서 조금 더 망설였다간 지하철에 타는 사람 수가 급격히 달라진다. 빠른 타결. 컴퓨터를 끄고 짐을 챙겨 나온다. 지하철 역으로 간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늘 역사 안에 있는 빵집이 눈에 들어온다. 뭐라도 사갈까? 아니, 오늘은 빵 기분이 아니야. 카드를 찍고 내려가 발이 기억하는 대로 맨 뒷칸 쪽 플랫폼에 선다. 이어폰을 낀다. 노래만 알고 얼굴은 모르는 걸그룹의 음악을 듣는다. 지하철을 탄다. 정신을 차리면 아침에 걸어왔던 환승 통로를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다. 노이즈 캔슬링을 비집고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온다. 퇴근 시간에 환승 통로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저 사람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볼 때마다 궁금하지만 금세 잊는다. 다시 지하철. 누가 다음 역에서 내릴까,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 오랜만에 정답을 맞혔다. 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다. 저녁은 뭐 먹지. 희대의 난제에 대한 고민과 함께, 다행스럽게도 별일 없었던 하루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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