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선 조경가가 땅에 써내려가는 시를 들여다보다
대학 시절, 다니던 학교의 캠퍼스를 참 좋아했었다. 어느 대학처럼 화려한 건물도 넓다란 잔디밭도 없었지만 캠퍼스를 거닐었던 시간들에 좋은 기억이 잔뜩 묻어있다.
무엇 덕분이었을까? 그때의 내가 누구보다 좋아했던건 캠퍼스 곳곳에 숨어있던 벤치였다. 수업과 수업 사이 시간이 남을 때면, 수업이 끝나고 친구를 기다릴 때면, 그리고 아무 일정이 없던 날조차도 늘상 우거진 수풀 사이의 벤치로 향하곤 했다. 마치 그 곳이 내가 있어야할 곳인 것처럼.
나무 벤치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생동하는 세상을 피부로 느껴내고 시간의 흐름을 깨달아보는 시간이 참 좋았다. 대단하고 웅장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그 대신 사람을 위한 길과 짙은 녹음이 있었다. 사람을 중심으로 설계된 길을 자연스레 따라 걷다보면 자동차와 한 번을 마주치지 않고도 푸른 잎들 사이로 건물 사이를 오가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 아름다웠던 기억의 뒤에는 바로 조경이 있었다. 우리의 도시는 본질적으로 삭막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이들이 매일을 살아가는 터전이기에 조경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자연은 인간 없이 살 수 있지만, 인간은 자연 없이 살 수 없기에. 인간이 있는 곳에는 늘 자연이 있어야만 한다.
영화 <땅에 쓰는 시>는 바로 그 자연으로 인간과 공간을 잇는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품철학에 대해 다룬다. 1세대 조경가로 불리는 그의 손에서 수많은 녹색 공간들이 만들어졌다. 식견이 짧아 그의 작품세계를 정확히 조망해내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건 그의 조경 속에서 자연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아숨쉬었다는 것이다.
작은 사물부터 몸에 걸치는 옷, 그리고 살아가는 공간을 꾸리는 건축까지,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디자인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 속에서 조경디자인이 단연 특별한 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조경(造景), 볕을 만들어짓는다. 볕은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됨이 없이 본디 그런대로 궤도를 따라 움직이며 자연을 생하게 한다. 그 볕을 짓는 조경은 봄-여름-가을-겨울 네 개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현재를 넘어 과거와 미래를 아울러 존재들의 어우러짐을 고민해야만 한다. 그래서 곧 조경은, 흘러가는 시간을 디자인하는 일이다.
정영선 조경가는 그에 더해 공간성 역시 탁월하게 고려해낸다. 존재들이 놓이는 위치로서의 공간성 뿐 아니라 수풀들이 본래 자라난 환경으로서의 공간성을 설계에 반영함으로써 그의 조경에는 소박해 주목받지 못하는 우리나라 자생종 식물들이 늘상 함께하고 있다. 시선을 단박에 끌어내는 화려함 대신 가만가만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소박함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낸다.
한 병원의 정원을 설계할 때면 환자들이 한바탕 울만한 자리, 가족들이 표정을 숨길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그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동시에 물길의 주변에는 주차장이 아닌 나무가 필요하다는 단호함이 함께 그의 조경 세계를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받쳐내고 있다.
그는 이제 한국에서 나무와 풀을 꾸미는 것을 넘어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조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은 산업화 시대 이후 오랫동안 성장의 길만을 택해왔다. 그 길에서 수풀은 항상 베어내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그 수풀 이면의 수많은 가치들 역시 필연적으로 함께 외면해왔다.
우리 사회가 작금에 맞닥뜨리고 있는 많은 병듦은 바로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그보다 우리에게는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이 필요한건 아닐까.
영화관을 벗어나 땅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부터 눈 앞의 푸르름이 어쩐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