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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경 Oct 03. 2024

14층의 벽

이웃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미스터 14D는 아파트 복도 벽에 몸을 바짝 기댄 채 꼼짝하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남편과 내가 반갑게 웃으며 맞이하자, 그제야 그는 우리에게 비틀비틀 다가왔다.

“미안...... 합, 미안...... 합니다.”

들릴 듯 말 듯 중얼대는 미스터 14D는 그 어디에도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천천히 팔을 흔들며 우리 집 거실로 들어왔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 잘 알 순 없었지만 내 본심을 들킨 것 같아 살짝 뜨끔 했다. 

“차를 한잔 드릴까요?” 

내가 차를 권하자 미스터 14D는 앉지도 서지도 않은 구부정한 자세로 황급히 왼손을 내저으며 고맙지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남편과 내가 미스터 14D와 만난 건 오늘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우리가 이 아파트로 이사 왔던  날이고, 두 번째는 새벽에 쓰레기를 버리다 부딪쳤고, 오늘이 세 번째다. 우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만난 그 남자의 이상한 자기소개를 들었고 동정심에 휩싸이게 되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머뭇거리며 자꾸 시간을 버는 그 남자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미스터 14D의 눈빛은 뭔가 간절했고 좀 더 깊은 대화를 원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남자를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냥 같은 층에 사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아파트의 유일한 동양인이고 젊은 부부였다.


“브루크너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당신들의 집 앞 복도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서 있었지요. 지난밤 저는 정리해야 할 수백 권의 책들 옆에서 잠시 졸았었어요. 보시다시피 저처럼 늙으면 정리 같은 단순한 일도 꽤 어려워집니다. 완벽한 정리를 하려고 마음먹은 지 벌써 일 년 째지만 아직도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분리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요. 아, 저는 당신들 바로 옆에 삽니다. 14D예요. 그래서 잠에서 깼지요. 거실 벽 쪽에서 음악 소리가 났어요. 꽤 크게 틀었던 것 같았어요.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을 들으셨죠. 그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전 여기 14층에 굉장히 오래 살았습니다. 다른 지역엔 거의 가본 적이 없어요. 저는 혼자 삽니다. 지난해엔 어머니가 돌아가셨죠. 그런데 여기 14층에서 그런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당신들처럼 젊은 사람들이었다니. 저는······꽤 오래전에 음악을 끊었기 때문에 집 안엔 아무것도 들을 게 없답니다. 이유를 말할 순 없지만······정말이랍니다. 그래서 전 아파트 복도로 나와 당신들 집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습니다. 그 음악이 끝날 때까지요. 정말 정말 기뻤습니다. 앞으로도 마음껏 크게 음악을 틀어 주시겠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견디기 힘든 어색함이 흘렀다. 남편과 나의 눈빛이 마주쳤고, 나와 남편은 미스터 14D에게 넌지시 물었다. 잠시 우리 집에 들러 같이 음악을 듣지 않겠냐고. 그러자 미스터 14D는 떨리는 목소리로, 죄송하지만 10분 후에 가도 되느냐고 물어 왔다. 아주 조심스럽게.

“물론이죠!”

 나와 남편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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