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
악몽을 꾼 지 일주일이 지났다. 미스터 14D와는 꿈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었다. 그 기묘한 웃음을 떠올리면 갑자기 몸이 차가워지기는 했다. 남편은 CD 플레이어의 스위치를 켤 때마다 미스터 14D가 듣기 좋게 볼륨을 높였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 집 벽을 타고 흘러갈 음악의 기운을 분명히 그 사람은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수줍은 노인이다. 나의 허락 없인 다시 우리 집을 방문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초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벨조차 누르지 못해 겁먹고 있었다. 내가 우려하는 그 무언가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무언가의 정의를 일부러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줄곧 이런 그림이 그려졌다. 먼지처럼 작은 알갱이들이 피어오르는 모습과 그것들이 내 시야를 가려 버리는 광경.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상상을 내가 하려고 한 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상상을 한 건 나다.
나는 나에 대한 통제력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음에 바짝 긴장했다. 툭하면 홍차를 끓이고 와인도 꽤 마셨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여유를 그야말로 참기 힘들었다. 껌이라도 딱딱 소리를 내며 분주히 씹어야 했고 양 팔꿈치를 잡고 맨몸 스콰트를 하다 나뒹구러 지기도 했다. 이유 없는 불안이 데굴데굴 내 주변을 굴러 다녔지만 별 다르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초저녁부터 소파에서 잠이 들었던 나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말소리에 눈이 떠졌다. 남편은 서점에 간다면서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또 뭘 사려고 간 건지.
“One thousand, Two thousand, Three thousand, Four thousand, Five thousand. 자 5초입니다. 5초라면 한 사람의 얼굴을 눈앞에서 보고 기억하는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바로 눈앞에서! 부인이 죽었습니다. 그 범인은 브라운 씨의 바로 앞에서 총을 겨누었습니다. 5초입니다. 여러분은 5초간 바라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부인이 바로 옆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다 총에 맞았습니다. 범인과는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5초를 세어 봅시다. One thousand, Two thousand, Three thousand, Four thousand, Five thousand. 이상입니다.”
금발의 여자 변호사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이것은 HBO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였다. 1998년도 캘리포니아에서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살해된 여자는 60대의 백인 여자로 남편과 관광 중이었다. 사건은 컴포트 인이라는 작은 호텔 파킹장에서 일어났고 목격자는 남편 이외엔 없었다. 브라운 씨는 때마침 걸어가던 경찰을 불러 살인자의 인상착의를 말했다. 마르고 키가 큰 흑인 남자로 짙은 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경찰은 곧 5분 거리 안에서 한 흑인 남자를 붙잡았다. 그 남자는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으며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구속되었으며 6개월이 넘게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흑인 남자가 겨우 열여섯 살의 소년이라는 거였다. 그 남자아이의 얼굴은 열여섯 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편으로 얼굴엔 거의 표정이 없었으며 부모님과의 대면에서도 목소리가 없는 사람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아주 가느다란 눈물 한줄기가 그 아이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물론 그 소년이 살인자란 확실한 증거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년이 브라운 씨의 부인에게 겨누었다는 총은 어디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부인을 잃은 브라운 씨의 강력한 말 한마디만이 증거라면 증거였다.
“나는 확신합니다.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이 범인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5초간 봤습니다. 어떻게 그런 걸 잊을 수가 있습니까? 저 사람이 범인입니다.”
나는 제대로 일어나 앉아 본격적으로 TV 시청을 시작했다. 그 흑인 남자애의 변호를 맡은 사람은 백인 국선변호사였다. 그는 그 자신이 일에 중독되어 있음을 인정할 정도로 온 열정을 다해 사건을 풀어나가고 있었다. 식사는 차에서 핫도그 따위를 씹으며 대충 끝내거나 거르기도 했고, 밤을 새우다 지쳐 의자에서 잠드는 날도 많았다. 그는 그를 도와주는 든든한 여자 비서와 함께 사건의 핵심을 파헤쳐 갔다. 그는 흑인 소년이 무죄라는 걸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었다. 그 확신은 흑인 소년이 경찰로부터 폭력을 당했다는 걸 알아냈다. 열여섯 살의 흑인 소년은 어두운 방 안에서 여러 차례 얼굴과 복부를 얻어맞았다. 그 후에 소년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을 했다. 자백서는 경찰 중의 한 명이 대신 대필을 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국선변호사는 예리하고 정교하게 경찰들을 심문했다. 폭력에 의한 거짓 자백서에 대해 물었다. 누가 봐도 경찰들의 말은 조금씩 앞뒤가 맞지 않았다. 식은땀을 닦으며 옆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경찰관도 있었다. 게다가 소년이 사건 당일 입었던 옷에 대한 브라운 씨의 말이 이랬다 저랬다 갈피를 못 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막연하지만 어쩌면 그 소년이 무죄일 것 같았다. 그 아이는 몹시 절망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가던 길을 그냥 걸었을 뿐인데 그 길 밑엔 어떤 음모가 있었던 걸까. 길은 거대한 구멍을 숨기고 있었고 언젠가는 그 안으로 누군가를 끌어당길 참이었다. 소년은 길 위에 덮인 얇은 흙더미를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 구멍에 빠진 것은 순전히 하늘의 뜻일 뿐. 물론! 이건 단순히 나의 느낌일 뿐이었다. 아침부터 나갔다는 그 소년의 알리바이는 전혀 밝힐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 소년을 보지 못했다. 그 소년을 기억하는 것은 브라운 씨 단 한 명이었다. 배심원들이 심판해야 할 마지막 날이 왔다. 국선 변호사는 승리를 확신하지만 만약에 대해서도 준비하고 있다며 큰 소리를 쳤고, 소년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의 끝이 어떻게 해결될지 못 견디게 궁금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들이 밀고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변호사의 마지막 변호가 끝나자 카메라는 배심원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클로즈업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다음 사람.
헉! 그 사람이다.
미스터 14D다. 그 남자다.
내 몸은 천천히 뒤로 젖혀졌다. 옆집에 사는 노인. 그의 얼굴임에 틀림이 없다. 그 사람이 저 화면 안에 있다. 그는 카메라의 정면을 잠깐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영혼을 사로잡을 것처럼 무서운 눈이다. 잠깐만! 이게 뭐지? 이건 꿈도 아니잖아······. 그럼 이게 현실이라고? 나는 얼음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이 아파트에 아주 오래 살았다고 했는데. 다른 지역엔 거의 가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 텔레비전 속, 미스터 14D가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다. 저 안의 시간은 1998년. 4년 전이다. 4년 전에 그는 어디에 살았던 걸까? 어쩌면 나의 착각일지도 모를 가능성에 텔레비전 화면을 계속 바라봤지만, 카메라는 다시 배심원들을 잡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졌다. 잠시 나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이어보려 애를 썼다. 어쨌든 그가 범죄와 상관이 있는 건 아니라고. 그는 그저 나라의 부름으로 배심원이 되었을 뿐이다. 이런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나도 미국 시민이 된 지 삼 년이 넘었다. 이것은 국민의 의무로 당연한 일이다. 그가 4년 전에 어디에 살았던지 그런 건 나와는 관계가 없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다. 세상은 때론 좁고 그 좁은 틀 안에서 우연히 부딪치는 일 따위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두려움은 생각을 그대로 이해만 하기엔 이미 어마어마하게 커져 있는 상태였다. 아까 그가 바라본 나는 현실의 나니까.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악몽이 현실로 사다리를 내리고 있다고. 그가 나에게 말하려 한다고. 나는 인터넷으로 TV 가이드를 뒤졌다. HBO는 언제나 재방송을 한다. 나는 다시 보아야 한다. 그 남자가 그 남자가 맞는지 다시 확인해야 한다. 다음 주 월요일 9시? 손목이 자꾸 떨리고 있었다. 스크린은 시커먼 색을 빛내며 조금 전의 공포를 조용히 뿜어냈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아직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공연히 화가 치밀어 눈물이 났다. 나는 벽을 등지고 앉아 소리 없이 흐느꼈다. 두려움이 이렇듯 막연할 수 있다는 게 기막히고 분했지만, 탓할 수 있는 대상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와인 한 병을 꺼내 맛을 느낄 틈도 없이 속도를 내며 마셔 버렸다.
“아냐 아냐 그냥 또 꿈꾼 거야!”
나의 짧은 독백이 끝나자 누군가 세 번 우리 집 벨을 울렸다.
“딩동, 딩동, 딩동.”
남편은 늘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데······. 나는 잔뜩 취해 있었고 몸이 무거워 일어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지럽지만 문을 똑바로 바라보려 애쓰며 걸어갔다. 문의 손잡이는 겨우 잡았지만, 차마 열 수가 없었다. 누구냐고 물어보려다 나는 그냥 문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대로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벨은 더 울리지 않았고 10분쯤 후에 남편이 들어왔다.
“왜 이래? 혼자 취한 거야? 정말 너무하네. 같이 즐기면 안 되나?”
남편은 나를 침대에 누이고 반 잔 남은 와인을 마셨다.
남편에겐 열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