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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경 Oct 10. 2024

14층의 벽

발꿈치

집으로 들어온 지 20분이 가까워져 가고 있었지만, 미스터 14D가 누르는 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해. 20분이나 지났는데······바로 옆집인데. 옷이라도 갈아입는 건지.”

“정말······분명히 10분 후에 온다고 했잖아? 맞지?”

“그래. 그 사람이 뭘 착각하는 건가? 지금이 아니라고? 참 나, 귀찮게 됐네.”

 남편은 가지고 있던 모든 브루크너 CD들을 진열장에서 꺼내 들었다. 14D 그 남자, 음악을 끊었다니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그럼 끊었다는 음악을 우리 때문에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인가? 

나는 잠시 남편의 CD들을 노려보았다. 나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가 아니다. 뭐, 싫어하는 편도 아니어서 다행히 남편의 취미 생활을 방해하진 않는다. 남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오디오 스피커의 위치를 옮긴다. 1인치 앞으로, 2인치 뒤로, 2.5인치 옆으로. 이 스피커 옮김은 지치지도 않고 칠 년을 넘겼다. 가끔 내 눈에 눈가리개를 씌우고 스피커 가운데 앉혀 리스닝 실험을 하기도 했다. 어느 소리가 더 투명한지, 더 탁한지, 케이블 줄을 갈아 끼우며, 스피커의 위치를 바꾸며. 나는 솔직히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 가는 대로 말을 해버리곤 우쭐거렸다. 그러면 남편은 내 의견을 존중하며 넌 예리한 귀를 가졌다고 칭찬했다. 어처구니없지만, 나는 소리에 대해 잘 모른다. 정말 모르는 것이다. 운이 좋았던 걸까, 눈을 가리고 소리를 구분할 때마다 남편의 의견과 정확히 일치했다. 남편은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소리의 차이가 아니라 다음에 가위를 낼지 주먹을 낼지 그런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나는 예리한 귀를 인정받은 것이다. 어쩌면 또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고.

 “설마 문 앞에 귀라도 대고 서 있는 건 아니겠지? 으아, 무서워.”

 이상하지만 그 사람이 문밖에서 우리를 향해 서 있는 게 느껴졌다. 호들갑을 떠는 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그냥 문 열어봐.”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미스터 14D는 아파트 복도 벽에 몸을 바짝 기댄 채 꼼짝하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던 걸까. 정말 수상한 노인이다. 헉, 티 나면 안 돼. 웃자! 나는 다급히 표정을 바꿨다.

 “들어오세요!”

남편과 내가 활짝 웃으며 맞이하자 그제야 그는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엔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발행하는 두꺼운 책이 세 권 들려 있었다.

 “지금 책 정리를 하고 있다고 했던 말 기억하시죠? 이 책들을 선물로 드리고 싶네요. 이거 보세요. 동양 미술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그는 가져온 책들을 문 앞 탁자에 털썩 내려놓았다.

“너무 좋은 책인데요. 정말 주시는 건가요? 받아도 됩니까?”

내가 연거푸 묻자 그는 그럼요! 그럼요!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그는 왜, 벨을 누르지도 못하고 복도 벽에 그렇게 기대 있었을까? 조심스럽게 우리 집 거실 중앙으로 발을 내딛는 그의 걸음이 어쩐지 애처로웠다. 

“슬리퍼를 신으시겠어요?” 

내가 슬리퍼를 건네자 미스터 14D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아아아, 지금 더러운 양말을 신고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괜찮다면 신발을 그냥 신고 있을게요.”

“아, 네, 그러셔도 괜찮아요.” 

나의 대답에 미스터 14D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뭔가 혼잣말을 한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다시 공손 하게 물었다.

“차 한잔 드릴까요?”

내 물음에 미스터 14D는 앉지도 서지도 않은 구부정한 자세로 왼손을 이리저리 내저으며, 고맙지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했다. 그의 얼굴엔 난처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기분은 오히려 좋아 보인다고나 할까?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정말 예쁜 리빙룸이군요. 디자이너가 꾸민 것처럼요.”

두리번거리던 미스터 14D는 잠깐이지만 자신의 낡은 신발을 바라보았다. 짙은 브라운 색의 구두 앞쪽은 터슬터슬하게 표면이 거의 다 벗겨져 있었고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아주 미세한 가루들이 일었다. 그는 재빨리 발목을 세워 신발의 맨 앞쪽만이 바닥에 닿도록 발꿈치를 높게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그 이상한 자세로 음악을 듣겠다고?  

우리 집 카펫은 유난히 때가 잘 탈 것 같은 라임 그린이다. 나는 이사 오기 한 달 전부터 카펫의 색깔을 고민했고 이사하기 일주일 전에 라임 그린의 독특한 카펫을 주문했다. 거실 벽의 페인트도 그린 계열의 비슷한 색을 골라 톤을 맞췄다. 소파나 다른 가구들도 거의 하얀색으로 통일했고 벽들은 방마다 다른 색이지만 비슷한 톤의 파스텔컬러로 칠했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은 집 꾸미기 모두를 내게 맡겼다. 밤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계속 아침일 것 같은 그런 집. 그게 우리 집.

“제 아내가 꾸몄어요. 아트 스쿨을 졸업했죠. 인테리어에 관심이 좀 지나칠 정도라니까요.”

남편은 미스터 14D에게 초콜릿 칩 쿠키를 권하며 벌떡 일어났다.

“이거라도 드시겠어요? 지금 브루크너를 틀어 드리죠.”

미스터 14D는 고개를 들어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긴장하는 표정인지 그의 얼굴은 좀 전과는 달랐다. 혹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건 아니겠지. 사실 긴장을 한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의 낡은 구두가 맘에 걸렸다. 발레리나처럼 치켜 세운 그의 발꿈치, 그 낡은 구두 안에 발가락들. 얼마나 불편할까? 저러다 쥐가 나지는 않을까? 그의 양말은 왜, 어째서 더러운 걸까? 이봐요 미국 할아버지! 발꿈치를 그냥 좀 내리라고!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스피커의 볼륨만 커져가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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