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 사람이다.
나는 꿈을 꾸었다. 줄거리가 확실하게 기억나는 꿈. 하지만, 두려워서 말할 수 없는 꿈.
그 사람이 내 앞에 앉아서, 세상엔 존재할 수 없는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발행하는 두꺼운 책이 몇 권 들려 있고 여전히 낡은 구두를 신고 있다.
“꿈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던 상관없지 않습니까? 이제부턴 내 맘대로 음악을 듣겠습니다. 여긴 물론 당신 집이 맞아요. 하지만, 현실에서만 무단 침입을 금하는 거겠지요. 당신 남편을 깨우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만약! 깨울 수 있다면 말이죠.”
그 남자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그는 말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아래쪽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낡은 구두 안에서 답답한 가죽을 뚫고 여자와 남자가 섞인 목소리가 비스듬히 새고 있었다. 내가 그의 구두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 그는 능숙하게 진열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찾아냈다. 주로 브루크너의 CD들이었다.
“잘도 정리해 놓으셨군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알아서 골라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나를 위한 것 같군요. 당신들이 이사 오길 기다렸다면 믿으시겠어요? 하하하 게다가 소너스 파버는 저도 좋아합니다. 저도 날카로운 소리의 스피커는 별로거든요. 정말 따뜻한 이 집에 딱 어울립니다.”
그의 움직이지 않는 입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났다. 나 또한 지금 말을 하면 저 사람처럼 이상한 곳에서 소리가 나는 게 아닐까. 나는 침착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씩 균형을 잃어 갔다. 그래, 꿈이라면 깨버리자. 저 CD들 모두, 파워앰프와 프리앰프 그리고 스피커도. 나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것들을 다 부숴 버렸다.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마에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손수건을 내밀며 그가 말했다.
“오늘부터 시작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건 새벽 5시였다. 남편은 아직 자고 있었다. 휴, 지금은 현실이다. 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침실문을 열었다. 거실에 있는 할로겐램프를 켜자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다. 밝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위로가 된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꿈을 꾼 거지? 이렇게까지 선명한 이미지의 꿈은 처음이다. 하지만, 너무 어린아이 같다. 낮에 본 만화영화가 조금 왜곡되어 꿈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이건 정말 개꿈일 수밖에 없어. 미소를 지어 봤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꾼 꿈이 악몽이라기엔 좀 왜소해지는 것도 같았다. 홍차를 끓이고 어제 먹다 남은 치즈 케이크를 잘랐다. 갑자기 강한 식욕이 일었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았다.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케이크는 굉장히 맛있게 느껴졌다. 그래, 이게 진짜 현실이지, 하면서. 하지만 케이크가 접시 위에서 사라진 후, 갑자기 나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찍혀 있는 두 개의 갈색 점은 너무나 선명해 보였다. 그 두 개의 점은 바로 소파 아래 발이 놓이는 곳 카펫 위에 동그란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아까 낮에 미스터 14D가 앉아서 두 시간 넘게 음악을 들었던 자리다. 그는 두 시간 동안 내내 발 앞쪽만을 바닥에 대고 앉아, 두 다리의 힘을 그 좁은 공간만으로 버틴 모양이었다. 그에게 신발을 벗게 하고 발이 편한 슬리퍼를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가 신발 벗는 걸 원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여기가 미국이라는 걸 생각했다. 아무리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닥이라도 손님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 남자는 두 개의 점을 도장처럼 찍어 놓고 가버린 것이다. 그가 앉았던 자리야. 소파가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 속이 불편해졌다. 일어나자마자 단 케이크를 먹은 탓일까. 한두 번 구역질을 하고 다시 침실문을 열었다. 코 고는 소리에 한기가 사라져 갔다. 남편이 있다는 게 대단한 일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아까 꾼 꿈은 악몽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