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애초(母愛草)
며칠 집을 비운 사이에 봄 손님이 오셨다. 마당 가에 원추리가 뾰족뾰족 올라온 것이다.
춘삼월 이맘때, 겨우내 기지개 켜며 제일 먼저 눈을 뜨는 게 원추리이다. 원추리는 논두렁이나 개울가 등 습지가 있는 곳에 터를 잡아 순을 올린다. 연둣빛 어린 순의 뿌리 쪽으로 칼집을 깊게 넣어 들어 올리면 이파리 아랫부분 속살이 하야니 노르스름하게 따라 나온다. 간혹 난초 종류가 아니냐고 하는데 백합과 식물이다.
조선의 농업서적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원추리’ 또는 ‘업나믈’이라 기록되었고,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넘나믈’이라고 하였다. 아마 잎이 넓어서 넘나믈이라는 별칭이 붙었지 않았을까. 원추리 이름의 유래는 ‘근심을 잊게 하는 식물’이라는 ‘훤초(萱草)’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훤초->원초->원추로 그 유래를 두고 있다.
당 태종 이세민의 어머니는 집 뜰에 ‘훤초(萱草)’를 가득 심어 ‘훤당(萱堂)’이라 하였다. 어머니를 높여 부를 때 ‘훤당’이라 하는데, ‘훤’은 원추리를 뜻한다. 원추리를 보면서 무더운 여름에 쌓이는 시름을 잊을 수 있다고 해서‘ 망우초(忘憂草)’, 지난해의 마른 잎이 새순이 나올 때까지 남아, 마치 어린 자식을 보호하는 어미와 같다 하여 ‘모애초(母愛草), 모예초(毛蕊草)’등으로 불린다.
원추리를 우리말로는 ‘근심풀이풀’이라고 한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초로 알려져 있다. 사람과 헤어질 때는 작약을 선물하고, 먼 곳에 가는 사람을 빨리 돌아오게 하고 싶을 때는 당귀를 선물하며, 근심을 잊으라고 원초를 선물한다는 풍습이 있었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모란꽃을 즐기다가 ‘오직 원추리는 근심을 잊게 하고 모란꽃은 술을 더욱 잘 깨게 한다’라는 시를 읊었을 정도였다.
옛날, 형제가 한꺼번에 부모를 여의었다. 형은 슬픔을 잊기 위해 부모님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었고, 동생은 부모님을 잊지 않으려고 난초를 심었다. 형은 슬픔을 잊고 열심히 일했지만, 동생은 슬픔이 더욱 깊어져서 병이 되었다. 어느 날 동생 꿈에 부모님이 나타나 말했다. “사람은 슬픔을 잊을 줄도 알아야 하느니라. 너도 원추리를 심고 우리를 잊어다오.” 동생도 부모님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고 슬픔을 잊었다고 한다.
원추리는 성질이 서늘하고 맛이 달다. 산야초는 대게 독특한 향과 쌉싸래한 맛을 가지고 있는데, 원추리는 별다른 향이 없다. 반면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원추리는 생으로 먹지 말고 데쳐서 먹어야 자체 독성을 제거할 수 있다.
겨울이 가는지 봄이 오는 지도 모른 채 한동안 정신을 놓고 지냈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뵈러 시골로 달렸고, 병원에 모셔두고 마음 아파했다. 병원에서 열하루를 보낸 어머니는 떠나셨다. 조부모님과 아버지까지 다 모시고 가겠노라며, 파묘하여 화장해서 같이 흙으로 보내 달라고 하셨다. 고운 가루가 된 엄마의 흔적은 따뜻했다. 눈물로 얼룩진 하늘을 보았다. 하늘빛은 푸르다 못해 시리고 아렸다. 햇살이 날개처럼 활짝 펼친 하늘길을 따라 어머니는 훨훨 떠나셨다.
삶터로 돌아온 날, 마당 가에 원추리 새순이 쏙쏙 올라오고 있었다. 어린 날, 종다래끼 들고 양지바른 구시벌 봇도랑 가에서 원추리를 뜯었다. 원추리는 금세 종다래끼를 채웠다. 봄바람이 까슬했으나 어머니가 데쳐서 무쳐준 그 다디단 나물이 저녁 밥상에 올라오는 게 좋았다. 장과 기름을 넣어 조물거리면 한 접시 반찬이 차려졌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마른 풀, 모애초(母愛草)는 시들어서 말라 비틀어지면서까지 어린 자식을 보듬고 있었다. 지난 여름철에 집들이 오시어 “꼬마를 산속에 두고 가니 마음이 편치 않다.”던 어머니. “엄마, 후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