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하고 묵직한, 버려야 하는
이 글은 아기를 한 팔에 안고 애플 워치로 녹음을 한 이야기들이다.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넹, 에, 앙 하고 아기가 대답을 해 준다. 요즘 둘째가 하는 옹알이는 ‘엄마, 나 잘 크고 있어요’ 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에 내 기분을 한껏 드높여 준다. 방금 아기가 하품했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우리 한숨 자자. 아가가 보채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안고 서서 다독이며 재워야 한다. 나도 좀 5시간만, 4시간 아니 3시간만이라도 논스톱으로 자보고 싶지만 아기부터 재워야지 하고 만다. 딸들을 재울 때마다 어느 좁은 상자에 아이를 욱여넣는 것 같아 몹시 죄책감이 들때가 있다. 그러나 아이를 재우고서야 내가 숨 쉴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아이를 잠재우는 일은 가장 버거우면서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주려해도 받지 않는 잠을 두고 아이와 몇 번이고 싸움에 나서야 하는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15분 전에 일어난 첫째는 주섬주섬 옷을 입는 것 같더니 식탁에 가서 앉았다. 어제저녁으로 정말 잘 먹었던 꽃게탕에 밥을 말아줬는데 ‘이거 싫어!’ 하고는 바로 일어나 다시 잠바를 입으러 가는 것이었다.
“한 숟갈이라도 먹어, 아니면 못 가. 배고프잖아.”
“밥 위에 야채가 왜 이렇게 많아? 싫어. 안 먹어!”
얼굴을 마주 보고 나누는 대화 중에 반이 아마 ‘안 먹어. 안 해. 안가. 안 입어. 싫어 싫어 싫어.’ 일 것이다. 로션은 바라지도 않는다. 머리는 산발에 세수는커녕 눈곱도 깨작거리며 떼다가 머리띠 하나 대충 얹어 나가려는 애를 붙잡아 로션을 바르라 하고 양치를 시켰다. 아이는 대충 물로 우물우물 퉤- 뱉고는 3초 만에 화장실에서 튀어나왔다.
아이가 아침부터 짜증 내는 이유는 다름 아닌 리듬 체조 수업 때문이었다. 척추가 약간 휘어져 있고 , 안짱다리도 있어 교정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겠단 말을 앞세워 극적으로 오케이를 받아냈다.
우선 체험 수업을 한번 다녀온 후 1년을 다니기로 하고 장난감을 사줬었는데, 그것도 힘들다 하여 얼르고 달래서 6개월까지 줄여 줬다. 그런데 맙소사! 어제는 갑자기 장난감을 다 버릴 테니 리듬 체조를 가지 않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딜이라고 해야 하나. 흠칫 놀랬다.
원장님이 강단 있는 분이시라 아이들의 기강을 확 휘어잡는 스타일로 수업을 하시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히려 좋았다.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아이들을 대하는 대부분의 기관들은 ‘아이맞춤’으로 수업을 하거나 ‘난 몰라요’ 식으로 개입을 아예 안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는 이런 칼 같은 분위기가 더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이는 체조 수업 첫날과 셋째 날에 개구리 자세를 하다가 선생님이 위에서 눌러 눈물을 흘렸고, 두 번을 울고 나니 저렇게 가기 싫다고 대놓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애기 때부터 7년 동안 팔베개를 해서 재운 내 잘못이다. 체온 나누는 게 너무 좋고 행복해서 매일 밤 아이를 끌어안고 잤는데 그게 다시 원인이 되어 아이의 척추가 휘게 되었고 내 어깨와 목은 도수치료를 다녀야 할 만큼 뭉치게 되었다니. 그래도 잘 안 걸던 장난감을 걸고 한 약속인데,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처음에 수영장을 갔을 때도 가기 싫다며 화를 냈는데 지금은 수영 가는 날이 가장 즐거운 날이 되었다. 또 유치원 때 태권도장은 절대로 안 다니겠다고 버티는 아이 때문에 3일 동안 체험 수업을 갔었고, 겨우 우겨서 보낸 태권도장에서는 얼마 뒤 ‘어머니~ 아이가 날아다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안 하겠다고 고집부리던 아이도 적응 기간만 잘 지나면 새로운 세상을 즐겁게 바라볼 거라는 걸 알기에 약간의 타이트한 부분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의 기분에 맞춰진 유아기 삶에서 초등학생 삶(?)으로 완벽하게 건너가려면 약간의 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난 주 1회 리듬체조를 꾸준하게 보내볼 생각인데 큰딸은 그렇게 ‘싫어 싫어!!’ 하는 일상으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붙잡고 설득했다. 만약 선생님이 널 때리거나 밀어서 몸을 다치게 하거나 거친 말로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라면 엄마한테 꼭 말해줘야 해, 하지만 몸을 유연하게 만드는 일은 리듬 체조에 반드시 필요한 자세라서 그런거야, 수영 초반에 물을 자꾸 먹는다며 가기 싫다 울었을 때 포기했다면 지금처럼 자유형, 배영 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런 시기니까 힘내서 해보자, 리듬 체조는 열심히 하다 보면 몸도 가지런히 예뻐질 수 있어. 이런저런 말들로 설명을 하려 했지만 아이는 문 앞에 놓인 빗으로 제 머리를 퍽퍽 소리 나게 빗은 뒤 쾅 닫은 현관문 밖에서 ‘갈게!’ 소리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 버렸다.
저렇게 성질 내고 난 뒤 학교 가는 뒷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파트 단지를 걸어가는 아이를 종종 베란다에서 내려다보고 서로 손을 흔들기도 했는데 오늘은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졌지만 걸어가는 모양새도 궁금했다. 엄마에게 큰소리친 뒤 아이가 뛰어가는지 걸어가는지 씩씩거리며 가는지 종종거리며 가는지 천하태평으로 가는지 보고 싶었다. 베란다 밖으로 나가서 보면 들통이 날까 봐 아기를 안고 거실에서 까치발을 힘껏 들었다. 5초 정도 지났을 까, 아이가 걸어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온 힘을 실어 쿵쾅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늘 큰 포물선으로 앞뒤 힘차게 흔들던 실내화 가방도 위아래로 거칠게 출렁거렸다.
아기를 안고 소파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 봤다. 아이가 왜 이렇게 예의 없이 행동하지? 어디 감히 엄마한테 짜증 내고 툴툴대고. 모든 게 다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아이를 혼내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그런 모진 엄마인가. 그러고 싶지 않은데 화가 난다며 혼자 씩씩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더니 아기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히죽 웃었다. 맙소사! 얘가 나를 다 보고 있었네?
요즘 매워도 너무 매운 큰딸 때문에 둘째가 더 사랑스러운 건 사실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눈만 마주치면 와웅, 옹, 녜녜 하며 웃는 아기 앞에서 나쁜 생각은 다 증발되고 해피 바이러스가 온몸을 지배한다. 그러다 갑자기 아기가 토를 했다. 아기 옷을 살리려고 내가 입고 있던 옷을 손수건삼아 입가를 닦아줬다. 요즘에 토를 부쩍 많이 하는데 난 울분을 토하고 싶단다, 아가야. 왜냐면 매운맛 네 언니 때문이야. 엄마는 맵찔이라 무엇이든 순한 맛만 시키는데, 네 언니는 요즘 3단계 매운맛이다. 젖이나 만들어져라, 얼음 세 알 띄운 물을 벌컥벌컥 삼켰다. 떡볶이가 물에 불었는지 뱃속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묵직한 기저귀를 둘둘 뭉쳐놓은 것 같은 몸이 되었다.
ps. '차가운 평화(쿨피스)’도 따가운 입속을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아직 3단계일 뿐, 5단계나 그 이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