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래 놓여진 애쓴 마음 하나
"... 이게 뭐야. 하여튼 사진 진짜 못 찍는다니까."
"발을 여기 화면 끝에 맞춰서 찍어야지. 내가 보여줄 테니까 가서 서봐."
연휴를 맞아 작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너무 멀지 않으면서도, 떠난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고민했다. 한 번쯤 가보고 싶었지만, 가본 적 없는 경주로 향하기로 했다. 퇴원 후 처음 가는 여행. 잘 다녀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스쳤지만 이내 넘치는 설렘이 어둠과 함께 내려앉았다. 부스럭거리는 이불소리만 길어지던 밤, 머리맡에 고이 올려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하루 빠른 내일을 들춰다보다 한 장의 사진에서 손이 멈췄다.
드넓은 땅 위에 수십 그루의 소나무가 모여있는 풍경.
솔잎이 겹겹이 드리워져 푸른 하늘은 가려졌고, 그 틈으로 쏟아지는 햇살만이 나뭇가지를 비췄다. 사진을 보는 순간, 난 소나무 사이 어딘가에 서있었다. 눈을 감았을 땐, 어느새 평온함이 베개에 기대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사진 아래에 '등산코스'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요즘 폐주변으로 찾아오는 통증 탓에, 숨 쉴 때마다 가슴이 조여왔다. 오랜만에 떠나는 길인데, 나 때문에 여행을 망칠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숲을 마음 구석 한편에 미뤄둔 채, 다른 풍경 사진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마음은 소나무 숲에 점령당한 후였다. 쓰러지더라도 그 숲에서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무작정 걸음을 내디뎠다. 걸어가는 길 내내 크고 작은 소나무와 낮은 풀만이 마중을 나왔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숲길에 그와 나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다행히 20분쯤 지나니 소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마저도 헉헉대며 가슴을 부여잡고 올랐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내려쬐는 햇살로 세상은 뜨거웠다. 소나무 무리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소나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들 조금씩 몸이 휘어져 있었다. 곧게 서있는 나무만 보아온 내 눈에, 구부러진 선은 어쩐지 더 단단해 보였다.
휘어지고 부서지면서도, 이렇게 크고 높게 자랐다는 건.
아픔을 묵묵히 견뎌며 살아왔다는 거니까. 오랜 시간 동안을.
가쁜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나무의 숨을 나의 숨에 담았다.
그 순간, 나는 한 그루의 소나무였다.
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했다. 소나무들 사이에 아주 작게 내가 담긴 사진이었다. 풍경 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처럼 얼굴은 초점에서 벗어나 흐릿했다. '숲에 다녀왔구나' 하는 사실 확인용 사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와 열 장 남짓한 사진을 한 장씩, 천천히 넘겨보았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를 풍경 속에 작은 점으로 만들어버린 사진.
실제 얼굴 크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
노란색 티셔츠를 강조하기 위해 하반신을 싹둑 잘라낸 사진.
빛과 어둠의 대비를 표현하기 위해 얼굴 반쪽만 밝게 찍힌 사진.
'이건 왜 또 이렇게 찍은 거야' 혼자서 중얼거리며, 천천히 들여다봤다.
사진을 잘 찍을 줄도 모르고, 사진 찍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
찍어달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카메라를 들어주고,
"찍어줄 테니 저기 가서 서봐'라고 하면 투덜거리면서도 서고,
왜 이렇게 못 찍냐며 구박해도 이렇게 저렇게 카메라를 돌려가며 끝내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
원래라면 내 얼굴만을 살펴보며, 잘 나온 사진 한두 장만 남긴 채 모두 지웠을 거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내 사진이 아닌, 용이가 찍은 사진이라고 생각하니 지울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그건, 어떻게든 다르게 찍어보려 애쓴. 서툰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