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 속 아이의 생존 전략
나는 말을 아끼는 아이였다. 부모의 꾸지람과 눈치 속에서 내 감정과 생각을 숨기는 법을 배워야 했다. 침묵은 어린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부모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 감정을 억누르고 목소리를 삼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억눌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에게는 자연스레 말을 삼키는 습관이 생긴다. 부모의 기분이나 반응이 두려워서, 또 괜한 비난을 듣기 싫어서 차라리 침묵을 택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는 표정이 굳고 목소리가 작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겉보기에는 얌전하고 눈치 빠른 아이처럼 보여도 내면은 우울하고 위축되어 있다. 그런데 보통 주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소극적이냐"거나 "애가 참 얌전하네"라는 피상적 반응을 보일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침묵이 아이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라는 점이다. 'Silenced Child Syndrome'이라는 용어도 있는데, 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부모 앞에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배운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지칭한다. ‘Selective Mutism(선택적 함구증)’이 외상이나 학대의 결과가 아닌 반면, ‘Silenced Child Syndrome’은 환경적 억압과 부적절한 개입으로 아동의 전반적인 자기표현과 감정 발달이 억압된 상태를 말한다.
장기간의 자가 침묵으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는 여러 가지 신체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건강한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거나 감정을 억제하고 점점 더 내면으로 파고들게 된다.
침묵의 아이는 마음이 무겁고 복잡하다. 부모가 어떤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기에, 말을 하려다가도 혹시나 거슬릴까 두려워 접는다. 이에 익숙해진 아이는 점차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다. 주변에 ‘말이 없다’는 평판을 얻기도 하고, 가정 밖에서도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내가 뭘 말해도 소용없어"라는 생각은 습관처럼 자리 잡는다.
나의 기억은 조각난 파편들로 흩어져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기억의 한 조각은 이불속에서 몰래 눈물을 삼키던 밤이다. 밤이 깊어지고 집안이 조용해지면, 나는 이불속에 몸을 웅크렸다. 작은 흐느낌조차 들킬까 봐 숨을 죽이고 작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둠 속에서 흐르는 눈물은 베개에 닿아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작은 소리라도 새어 나가면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김없이 날아들었다. "뭘 잘했다고 울어?" 엄마의 목소리에 놀란 심장이 얼어붙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두려움에 입을 더 강하게 틀어막았다. 그렇게 어둠과 함께 삼켜버린 울음들이 어느새 나를 잠식해 갔다.
가족 식사 시간, 엄마는 언제나 동생에게만 물었다. "오늘 학교에서 뭐 했어?" 그 질문은 내게로 오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수저를 움직이며 동생의 대답을 들었다. 가끔은 아무도 묻지 않아도 내 하루를 기분 좋게 꺼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어김없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는 차가운 한 마디였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자”라고 다짐했지만, 말하지 않으면 “왜 그렇게 무뚝뚝하니? 네가 그런식으로 하니까 사랑을 못받지”라는 비난이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말은 점점 줄어들었고, 가족과의 대화는 내게서 멀어져 갔다.
지금의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너 같으면 너랑 말하고 싶겠니?"
어느 날, 학교에서 아카시아 꽃에는 꿀이 있고, 그것을 먹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꽃을 좋아하고 작은 것에도 호기심이 많던 나는 하굣길에 동네 산에 들러 조심스럽게 아카시아 꽃 한 송이를 땄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꽃을 내밀며 말했다. "엄마, 이것 봐. 아카시아 꽃에 꿀이 있대!" 마치 굉장한 발견을 한 것처럼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꽃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더러운 걸 왜 집으로 가져와?" 그리고 내 손에서 꽃을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손바닥 위에 남은 꽃의 잔향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꽃에게 미안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대화를 하기보다 아이를 통제하기 좋아한다. 아이가 조심스레 다른 의견을 내면 "네가 뭘 알아"라는 일축이 돌아온다. 이렇게 아이가 무시당하는 일이 거듭되면, 아이는 점점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특히 가족 모임에서조차 아이의 목소리가 묵살되는 상황이라면, 아이는 '침묵' 외에 대안이 없다고 믿게 된다.
침묵의 아이가 겪는 내면 갈등은 몸으로도 드러난다. 잦은 복통이나 두통, 잠을 설치는 불면증 같은 증상이 대표적이다. 이는 심리학에서 ‘신체화(somatization)’로 설명할 수 있는데, 억눌린 감정이 해소되지 못하고 신체적 증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부모는 이를 '꾀병'이나 '게으름'으로 치부하며 아이를 또 한 번 몰아세우곤 한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장기간 지속되면 일시적인 증상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 몸의 시스템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감기를 달고 살았고, 두통과 위장 통증이 나를 따라다녔다. 병원에 가면 의사는 늘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고, 엄마는 그럴 때마다 "괜히 예민하게 굴지 마, 돈만 버렸네"라며 타박을 했다. 나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건 내 몸이 대신 아파했던 거였다.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아픔으로 나타났다는 걸,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래는 작년에 내가 진료 기록지를 받아본 후,
챗GPT에게 해석을 요청했던 내용의 일부와 당시 작성했던 일기글이다.
전신 피로감: 만성 피로의 원인은 자가면역질환, 염증, 자율신경계 이상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지러움: 자율신경계 이상(특히 기립성 저혈압)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발열: 지속적인 발열은 전신 염증이나 면역계 과민 반응을 시사합니다.
관절통 및 근육통: 자가면역질환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ANA 양성 (1:160): 자가면역질환 가능성을 시사하며, 특정 질환(예: 쇼그렌 증후군, 루푸스)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자율신경계 이상: 신경 반사가 저하된 점(Lower DTR hyporeflexia)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신경 기능 저하를 나타냅니다.
ANA 양성 (Homogeneous, 1:160): 이는 자가면역질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특히 루푸스(SLE)나 쇼그렌 증후군에서 나타날 수 있는 패턴입니다.
염증 지표: ESR(혈침속도)와 CRP(염증 반응 지표)는 다소 경미하거나 정상 범위입니다. 이는 강한 급성 염증보다는 만성적인 염증을 시사할 수 있습니다.
신경학적 검사: Lower DTR hyporeflexia(반사 저하)는 신경계 기능 저하의 증거로, 자율신경계 이상이나 근신경계 관련 질환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예전부터 류마티스나 루프스와 관련된 거의 모든 임상증상을 보이고 있지만, 항체 검사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어디가 아파도 해결되는 게 없는 절망감에 10년 넘게 병원에 발길을 끊었는데, 루푸스를 앓고 있는 친구의 걱정에 다시 한번 병원 문을 두드렸다. ANA(자가면역질환 검사) 결과는 양성이 나왔다 음성이 나왔다 하는 경우가 없다는데 나는 그렇다. 수치로 보면 미미해서 그럴 수 있겠다 이해도 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모든 약품이나 화학 성분에 극도로 예민해서 거의 어린이 수준의 약만 복용 가능 하다. 이번 독감으로 타미플루를 복용해야 했는데 담당 선생님이 분명 부작용이 있겠지만 참고 먹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타미플루와 항히스타민제를 같은 시간대에 먹어서 잠에 빠지는 꼼수를 썼다. 그러나 한 달째 신경계 부작용으로 고통받고 있다.)
2024년 11월 25일 월요일
2024년 6월, 그나마 집에서 하던 온라인 영어 강의를 모두 정리하고 본격적인 휴직에 들어갔다. 처음엔 쉬는 동안에도 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에, 또 한 편으로는 몸 상태변화의 관찰을 위해서 유튜브 영상을 만든다던지 흥미로운 AI 툴 공부를 한다던지 하며 매일 얼마간이라도 앉아서 뭔가 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 한 달도 못 가고 7~8월 한여름은 극심한 통증과 지속되는 불명열로 흐지부지 지나갔고. 9월은 통증이 더 심해진 건지 견디는 힘이 약해진 건지 거의 누워 잠을 잤고. 올 초부터 크고 작은 병원들에 다니다가 10월에서야 불명열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처음부터 원인을 찾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늘 그런 패턴이었으니까. 그나마 암 같은 병이 없다는 것만 확인한 셈이다. 외출을 못 한 것은 지난해, 2023년 5월부터이고 체온이 높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10월이었으니까 만약 '병리적인 원인이 있었다면 벌써 돌아가셨을 것이다.'라는 반우스갯소리도 들었다.
2024년 9월 7일 토요일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진단명이 없으니 아픈 게 아니라는 식의 태도인 의사한테 뭐라 하고 내 편을 들어주는, 나를 안타까워하고 아까워하는, 이유 없이 자기가 미안해하고, 자기 몸보다 날 먼저 챙기는 그런 엄마.
서럽게 울었다. 눈물이 나지 않는 병이었는데 오늘은 서럽게 울었다.
침묵의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과의 갈등을 지나치게 회피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극도의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대화 중 사소한 마찰이 생기면 '혹시 내가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에 쉽게 무너진다. 반대로 누군가 자신을 칭찬해 주어도, 그 말이 진심인지 의심하며 속으로 움츠러들기도 한다. 직장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참거나,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의외로 간단한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기를 쓰거나, 일상의 작은 선택 "오늘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사 먹어보겠다" 같은 것을 해보는 것이다. 스스로를 표현하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작은 경험이 쌓이면, '내 말과 선택에도 가치가 있구나'라는 사실을 몸과 마음이 서서히 깨닫게 된다.
나의 시작은 페퍼로니 피자였다. 짜거나 달거나 자극적인 음식이 잘 맞지 않는 나는 단순한 토핑의 피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남편은 육식 파였고, 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피자를 시킬 때면, 나는 늘 남편을 먼저 떠올렸다. ‘남편이 피자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나도 모르게 고기 토핑이 가득 올라간 피자를 선택했다. 그렇게 2~3년 동안 내가 좋아하는 페퍼로니 피자는 식탁에 오르지 못했다.
어느 날, 작업실에 놀러 온 친구와 함께 피자를 주문하다가 나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친구가 툭 던지듯 말했다. "야, 그냥 두 판 시켜!"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내 입맛을 위해 두 판을 시킨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피자를 고를 때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먹고 싶으면 시켰고, 즐겼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 순간부터 ‘내가 좋아하는 걸 선택해도 괜찮다’는 감각을 조금씩 학습하고 있다.
침묵은 나의 내면 아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인 동시에 나 자신을 잃게 만드는 족쇄이기도 했다. 그렇게 감정을 억누르고 스스로를 숨기며 침묵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 감정은 점점 희미해지고, 내 목소리는 사라졌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그 침묵을 깨고 나의 감정을 다시 마주하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이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