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돌볼 자격이 있다
자신의 존재가 왜곡된 환경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자기 돌봄'이라는 개념이 낯설고 어색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뒤로 미루는 것이 당연했던 이들에게 스스로를 챙기고 사랑하라는 말은 사치스럽고 이기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죄책감으로 여길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속적인 심리적 소진과 정서적 결핍을 초래할 뿐이다.
자기 돌봄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정서적 건강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과정이다.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고, 내면의 안정과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스스로에게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욕구 충족이 아니라, 자기 존중과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굳이 내 감정을 신경 쓰지 않아도 살아지긴 했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종종 예기치 못한 불안이나 폭발적인 분노, 무기력감에 시달린다. 이는 오랜 시간 외부의 기대에 맞춰 자신을 억누른 결과이며, 억압된 감정이 부정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우선시하며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감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시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신체적 긴장이나 정서적 피로로 누적되어 삶의 질을 저하시킨다.
나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어렵다. 오랜 시간 간직하면 힘들어지기에, 무의식적으로 덮어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글을 쓰기 위해 예전 다이어리와 메모장을 찾아보니, 언제나 아팠던 흔적들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 기록들은 단순한 기억의 조각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외면해 왔는지를 증명하는 흔적이었다.
2012년 5월 5일
기침 때문에 한두 시간을 편히 못 잔다. 충격 때문인지 꿈은 늘 악몽이고. 어제와 오늘 코와 귀에서 피가 조금씩 난다. 심하게 기침을 해대는 날 엄만 곱지 않은 눈으로 본다. 피곤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나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아지겠지?
2012년 5월 8일
엠부에 의존해 숨을 쉬는 00의 쌕쌕거리던 가는 목소리가 겹쳐진다. 폐가 안 좋긴 한가보다. 힘들다.. 나 진짜 괜찮은 건지.. 괜찮아질 건지.. 사실은 나도 무서운데.. 누구에게도 말할 수도, 누군가 이해할 수도 없다.
2012년 5월 26일
"돌아갈 수 있다면 몇 살 때로 돌아가고 싶어?" 늦은 저녁으로 일본식 퓨전 바에서 안주와 유자 막걸리를 홀짝이는, 고만고만한 나이의 젊은 처녀들의 수다였다. 난 변하는 것은 없을 것 같기에 같은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면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였다. 감히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말하고 있다.
2012년 6월 9일
하루 라도 통증의 괴로움 없이, 또 엄마의 눈빛에 마음 졸이지 않고 살고 싶다.
2013년 3월 9일
하루만 숨을 편안히 쉬어 보고 싶다. 하루만 아무 통증 없이 살아 보고 싶다.
2013년 7월 4일
순간 뒷걸음질 친 사람이 내 발등을 밟고는 뒤에 있었던 나를 탓하며 성을 낸다. 나는 뒤에 있어 미안했다고 할 만큼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성을 낸 사람은 내 엄마이다.
2014년 7월 27일
힘내자 이 말을 앞으로도 얼마나 더 외워야 할까
2014년 12월 15일
‘당신의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지금은 그 어떤 것에도 고통받지 않기를’ -프리다에게-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이 어떻게 쌓여 독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를 갉아먹으며 몸과 마음을 모두 지치게 했는지 선명하게 보인다. 억눌린 감정이 해소되지 않으면, 결국 신체적·정신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치며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자기 돌봄은 이런 악순환을 끊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가’를 명확히 인식하는 첫걸음이다.
자기 돌봄의 첫걸음은 ‘나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너는 너무 게을러”, “이것밖에 안돼? 더 열심히 해야 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었다면, 휴식조차 죄책감과 불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내면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돌보는 행위를 방해하며, 긴장과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유발한다.
이때 ‘나는 충전이 필요한 존재다’, ‘스스로를 돌볼 자격이 있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자기 돌봄의 첫 단계로, 휴식이 나태함이 아니라 건강한 삶을 위한 필수 요소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죄책감 없이 쉴 수 있는 시간을 갖는 연습은 마음의 체력을 채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짧은 시간이라도 자신에게 집중하며, 휴식이 삶의 균형을 잡아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감정을 기록하는 것은 자기 돌봄의 중요한 방법 중 하나다. 감정일기를 작성하며 ‘오늘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무엇인가’, ‘그 감정을 느낀 상황은 어땠나’, ‘이 감정에 어떻게 반응했나’ 등을 적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정기적으로 작성하면 감정 패턴과 스트레스 유발 요인을 파악할 수 있으며, 감정 조절 능력을 키우는 데도 유용하다.
나는 다이어리를 꾸준히 기록하는 것이 어려웠다. 속상한 마음에 일기장에 글을 쓰고 나면 그것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오히려 내가 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내가 겪은 일을 기록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오는 듯했고, 차라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그때 감정일기의 개념을 알고 실천했더라면, 감정을 더 건강하게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아이가 그럴만한 힘이 있었을까 하는 안쓰러운 생각도 든다. 만약 누군가 마음을 돌볼 수 있도록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정서적 학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지속적인 경계 상태로 인해 신체가 긴장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만성적인 피로와 근육의 경직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규칙적인 운동으로 몸을 이완하고, 자연스럽게 심리적 안정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운동의 선택은 개인의 취향과 신체적 조건을 고려하여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러닝, 댄스, 수영 등 활동적인 운동은 에너지를 발산하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유용하다. 새로운 운동을 배우거나 그룹 운동에 참여하면 사회적 교류를 촉진하고, 새로운 관계를 통해 정서적 지원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체적인 제약이 있거나 격렬한 운동이 어려운 경우라면, 스트레칭, 요가, 가벼운 산책, 또는 근육 이완을 돕는 마사지와 같은 방법도 효과적이다. 중요한 것은 신체 활동을 통해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가족이 힘든데 혼자만 쉬려고 하느냐”, “모두 고생하는데 너만 여유 부리는 건 아니냐”와 같은 말들은 자기 돌봄을 시도하려는 마음을 위축시키고 죄책감을 심어준다. 이러한 사회적 압박은 자신을 우선시하는 것을 잘못된 행동으로 여기게 만들고, 결국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기 돌봄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 자신의 신체적, 정서적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타인을 온전히 돌볼 수 없으며, 관계의 질도 악화될 수 있다. 자신을 충분히 돌보는 것은 타인에게 더 안정적인 사랑과 배려를 제공할 기반이 된다.
자기 돌봄의 과정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 아래서 성장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목소리를 내면화하고, 자기 돌봄을 방해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심리 상담을 통해 이러한 패턴을 발견하고 교정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상담 외에도 인지행동치료(CBT), 수용전념치료(ACT) 등의 심리 치료 기법을 통해 부정적인 사고 패턴을 재구성하고 자아 존중감을 회복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자기 돌봄은 단기간의 프로젝트가 아닌 지속적인 과정이다. 한두 번의 시도로 모든 상처가 아물 거라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를 반복적으로 실천하며, 자신을 존중하는 습관을 형성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은 짧은 명상을 통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일은 산책하며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모레는 좋아하는 음식을 직접 요리하며, 자신을 돌보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지속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삶의 루틴이 형성된다. 자기 돌봄은 큰 변화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선택들의 결과로 자리 잡는다. 중요한 것은 단번에 완벽한 변화를 이루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속도에 맞춰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이 형성되면 몸과 마음의 회복 속도가 빨라지고, 스스로를 돌보는 능력이 더욱 탄탄해진다.
자기 돌봄을 실천하면 부모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오랫동안 부모의 기대와 요구를 먼저 고려해 온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우선시하는 것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작은 실천들이 반복되면서, 자신을 돌보는 일이 더 이상 죄책감이나 불안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나를 돌보는 일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되어 갈 때, 비로소 외부의 평가와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힘을 기르게 된다. 자기 돌봄은 자기 존중이며, 나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다. 꾸준히 나를 돌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타인의 기대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