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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를 말해야 할 때

by Mia 이미아

나는 늘 아플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다. 몸이 아픈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 하는 자책이 뒤따랐다. 아픈 아이에게 비난을 퍼붓던 부모에게는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웠고,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나에게 학교도 사회도 불가능한 일들을 당연하게 요구했다.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었지만, 아픈 몸은 마치 내 개인적 실패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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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나는 자주 아팠고, 신체 활동에도 뒤처졌다.


턱걸이와 줄넘기는 하나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고, 윗몸일으키기를 할 때마다 척추를 따라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학교 수련회에서 조교 선생님들의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산행에 강제로 오르기도 했지만, 내려오지 못해 전교생이 산 아래에서 나를 기다려야 했던 일도 있었다.


감기는 낫기가 무섭게 다시 걸렸고, 내 감기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지 않았다. 여름이면 눈앞이 노랗게 흐려져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체온 조절이 잘되지 않았다. 아주 더운 날을 제외하면 항상 스카프를 두르고 살아야 했다. 겨울에는 보드라운 실크와 두꺼운 니트를 두세 겹씩 감싸야 견딜 수 있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 아래에서 의료적 돌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가족들은 내가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더 혹독하게 부렸고, “무균실에서 살아야 하냐?”, “유난 떨지 마라”같은 비난을 일상적으로 내뱉었다. 돌아보면 가족들은 오히려 나보다 내 한계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견디고 삼키는 것밖에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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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족을 떠난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병원에 갈 때마다, 누군가 내 증상을 물을 때마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설명해야 했다. 검사 결과가 정상이고 명확한 병명이 없다는 이유로 내 고통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의사들조차 쉽게 말했다. "스트레스 때문이에요.", "좀 쉬면 나아질 거예요." 그런 순간마다 나의 증상은 병이 아니게 되었고, 나는 아프지 않은 사람이 되어 나의 사회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야 했다.


사회는 질병을 개인의 관리 문제로 본다. 충분히 쉬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거나, 생활 습관이 잘못되어서 아픈 것이라 쉽게 단정 짓는다. 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은 '아프지 않기 위해' 평생 노력해 왔다. 누구보다 자신의 몸을 돌보려 애썼고, 건강해지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아픈 것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환경과 구조의 문제였다.




현대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설명되지 않는 고통은 존재한다. 명백한 통증이 있어도 수치로 증명되지 않고, 모든 검사가 정상으로 나와도 몸은 아프다. 그럴 때 사회와 의료는 너무 쉽게 꾀병이라 단정한다. 환자는 자신이 진짜 아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 병원을 다닐수록 자기 몸을 믿기보다는 타인을 설득하는 일이 늘어간다. 그렇게 환자는 점점 작아지고, 결국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아픈 몸을 개인의 잘못으로 보는 시선은 결국 사회적 폭력이다. 이 폭력은 “너는 노력하지 않았다”는 말로 포장되어 환자에게 죄책감을 씌운다. 하지만 불명의 질병은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다. 아프다는 사실이 개인의 잘못이 아니듯, 회복과 돌봄의 책임도 개인에게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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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 사회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픔을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 아픈 사람을 비난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내 몸을 돌보는데 특별히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나는 내 아픔을 나의 실패로 여겨왔다. 이제 나는 묻고 싶다. 정말 이것이 내 잘못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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