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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환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내가 아픈 걸 설명하는 방법 | 증상의 관찰과 객관적 기록

by Mia 이미아

지난달에도 나는 만나는 의사마다 내 증상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했다. 처음 만나는 D 신경과 의사에게도, 지난가을부터 약을 처방받아 온 A 신경외과 의사에게도, 2021년부터 진료를 이어온 B 정신의학과 의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4월, C 대학병원에서의 모욕적인 비뇨기과 진료와 무성의한 신경외과 의사 때문에 상처를 받고, 내과 주치의의 소개로 D 신경과 의사를 찾아갔다. 내과 선생님과의 신뢰가 있었기에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결과를 기대했다. 나는 MRI 영상, 판독지, ENG 검사 기록까지 철저히 준비해 접수했고, 의사는 이미 내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전달받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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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C 대학병원 신경외과에서는 내 MRI 영상을 곁눈질로 1초도 보지 않고, 내 증상이 ‘척수 낭종 때문일 리 없다’고 단정했다. 내가 어디가 아픈지 묻지도 않았고, 내 말 중 어느 한 부분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그날 오전 비뇨기과에서 받은 검사 결과를 근거로 한 섣부른 판단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그래서 허리, 골반, 다리의 통증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 왔는지, 5분 이상 걷기조차 힘든 상황이라는 점을 설명했지만, 의사는 듣고 있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 경험을 정신의학과에서 이야기했을 때, 정신과 의사는 “신경외과 전문의니까 보면 알았을 거예요”라거나 “MRI 판독지가 있었을 수도 있죠”라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 의사를 대신 변호했다. 나는 내 감정 기록을 위해 모욕감과 부당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대화는 이상하게도 다른 의사를 옹호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참고로,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의사이든 간에 무언가 판단할 만큼 모니터를 오래 본 적이 없었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그저 흘깃 곁눈질했을 뿐이다. 당시 내가 제출한 자료에는 MRI CD만 있었고, 판독지는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내 임상 증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새로 만난 D 신경과 의사 선생님으로 돌아와서, 앞서 말했듯이 이번에는 판독지와 ENG검사 기록까지 전부 준비해서 제출했다. 의사는 내 기록을 띄워 보며 말을 시작했지만, 설명은 이미 내가 GPT와 Perplexity 등으로 확인한 내용이었다. 단지 지나치게 축소된 느낌이었다.


그는 다리 통증 부위를 물었다. 내가 ‘뒤쪽과 옆쪽이 아프다’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그는 해부학 그림을 띄워 ‘앞쪽 통증’을 가정한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그 부위에 통증을 느낀 적이 없다고 덧붙이자, 그는 내 말을 끊고 그림으로 되돌아가 자신의 설명을 이어갔다. 나는 기억을 되짚느라 말을 잠시 멈췄지만,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 몸의 감각보다 자신의 그림에 더 확신을 두고 있었다.


해부학 그림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이렇게 아프기 때문에 내 낭종의 위치와 맞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했다. 나는 그 부분이 아프다고 한 적이 없었고, 내 몸을 해부도처럼 구간을 나누어 느끼는 재주도 없다. 마치 '저는 채끝살과 우둔살, 그리고 사태가 아파요'라고 말하라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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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욱 이상 했던 것은 그는 끝에 내가 요구할 때까지 MRI 영상을 보지도 않았다. 그저 제대로 진료를 하지도 않고 내 증상이 척수 낭종 때문일 리 없다 했던 그 신경외과 의사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정해놓은 틀 안에 내 증상을 끼워 넣으려 했다.


듣다 듣다 답답했던 남편이 자율신경계 영향 가능성을 물었을 때, 그의 반응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가 말하는 자율신경계는 우리가 아는 그것과 전혀 달랐다. 나는 불명열, 빈맥, 어지럼증, 체온의 불안정 등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설명 가능한 증상들을 이야기했지만, 의사는 배뇨장애만을 문제 삼았다.


그는 T1, L2 부위의 교감신경 그림을 보여주며 “배뇨 기능은 상부 흉추에서 기원하므로 S1 낭종과는 무관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뇨를 조절하는 핵심은 척수의 S2~S4 부위 부교감신경이다. 이 부위는 방광 수축, 괄약근 이완, 배뇨 반사 등 주요 기능을 담당하며, S1 부위 낭종은 이 구조에 근접해 신경 전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최신 논문에서도 S1 주변 낭종이 자율신경 기능 이상과 배뇨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고 보고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리서치하던 중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림에 의존한 채 내 증상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마치 내 통증이 그림에 맞지 않으니 통증의 위치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은 그림처럼 분절되지 않고, 통증은 경계 없이 흐른다.


그는 낭종이 원인이 아니라고 단정하면서도, “수술을 해보면 증상이 나아질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인과관계를 부정하면서 치료 가능성을 언급하는 모순된 태도였다. 이는 환자의 희망을 이용하는 무책임함처럼 느껴졌다.




또다시 아무 방책 없이 진료실에서 내쫓기기 직전에, 나는 친구에게 들었던 병명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혹시 소섬유 신경병증이라는 게 있나요?" 그제야 의사는 내 통증이 그 질환 때문일 수도 있다며, 다만 진단도 어렵고 치료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그렇다면 어디를 찾아가야 하나요?"라고 묻자, 그는 말초신경을 주요 진료 대상으로 삼는 신경과나 통증의학과를 추천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병원을 나서며 본 입간판에는 이미 '말초신경질환, 신경계 희귀 질환'이 명시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 병원은 간판에 의하면 내가 물은 병명을 다루는 곳이었다. 그는 나를 진료하려 하지 않았고, 그 병명이 말해지기 전까지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소섬유 신경병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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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날은 최소한의 통증을 덜기 위해 신경외과 약 처방을 받고자 A신경외과에서 원격진료를 받았다. 외출이 힘든 내게 원격 진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의사는 한 달간의 경과를 물었고, 나는 5월 어느 날 외출 후 휠체어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6시간 앉아 있던 것이 무리가 되어 아랫배 통증으로 이어졌으며, 그 통증이 며칠간 지속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의사는 내게 "휠체어는 왜 타셨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지난가을부터 걷기 힘들 정도의 통증을 지속적으로 호소해 왔고, 5분도 서 있기 어렵다고, 걷고 싶다고 반복해서 말해왔지만, 그는 전혀 들어본 적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리고 며칠 전, B 정신의학과에서 "어떻게 지내셨냐"는 질문에 나는 최근 겪은 병원 진료 경험들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의사는 또다시 동료 의사들을 감쌌다. 심지어 “가는 곳마다 그렇다면 무언가 있는 게 아닐까요?”라는 말까지 했다. 나는 차분히 답했다. “저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제 증상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진료조차 받지 못해 속상한 것뿐이에요.” 하지만 그는 끝내 내 감정보다는 해결책을 강박적으로 찾으려 했다.


서로 아무 관련 없는, 아니 없어야 마땅한 의사들이 환자의 말보다 서로의 진단을 더 신뢰하고 감싸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태도는 결국 고통을 호소하는 이의 현실보다, 같은 직역 내부의 권위와 판단을 우선시하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환자의 고통을 보려 하지 않는 순간, 의학은 삶과 멀어진다.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순간, 의사는 치유의 자리를 잃는다. 진단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외면해도 되는 것도 아니다. 실재하는 고통과 마주할 용기가 없다면, 의사와 의학은 더 이상 치유의 영역에 머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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