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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May 08. 2023

수수한 론도

우리 안에 세월이 자리하는 방식

https://youtu.be/HzBPWGDVfg0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 아니 에르노, <세월>


나는 이곳을 안다. 분명 언젠가 본 적 있는, 몇 번이고 찾아온 적 있는 익숙한 풍경이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 이름 모를 꽃들이 한가득 피어 있고, 그 잎은 방금 비가 그친 듯 촉촉이 부풀어 있다. 나는 그네에 앉아 내 키보다 더 커진 그림자를 바라본다. 언제부터 앉아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옷은 물방울 하나 머금지 않은 채 기약 없는 바람이 등을 밀어주기만을 기다린다. 내 것이 아닌 이 들판에 나는 지독히도 자주 돌아온다.


멈추어 있지 않은 시간은 어디에도 없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살아갔던 기억이 없다. 눈을 떠 보니 그저 그만큼의 달력이 넘어가 있길래, 아, 아마도 이 정도 규모의 시간이 존재했었겠지. 그래도 나는 그 안에서 헤엄칠 때 제법 행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오로지 죽은 듯 멈춘 시간들만이 타협의 여지없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삶에 이따금씩 찾아오던 정적. 그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라고 정확히 기억한다. 흐르며 투명해지는 시간과 멈추어 가라앉는 시간을 번갈아 살아간다. 내게 시간이 공평하게 흐른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없는 시간의 무엇을 기억하는가. 운 좋게 백업되어 있던 2018년의 사진이나, 방을 정리하다 발견한 2015년쯤의 악보, 2009년에 썼던 헛웃음 나오는 추리소설... 어떤 것도 내게 현실성을 주지는 않는다. 내게 그 시간이 존재했다는 게 좀처럼 와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아마도 내 추억이라 믿고 싶은, 아름답고 쓸쓸한 누군가의 들판으로 계속해서 돌아간다. 나에게 ‘일어났으면 했던 일’이, ‘아마도 일어났을 일’을 거쳐 ‘일어난 일’이 되어간다. 세월 속 기억의 반복 속에서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한다. 나에게도 분명히, 사진이나 악보 따위의 물증들과 논리적으로 호응하는, 이 들판과도 같은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2차원 동역학 이론에서, 어떤 닫힌 곡선 경로 주위의 모든 움직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경로의 궤적을 따르게 될 때, 이 폐곡선을 limit cycle이라 한다. 이때 시스템은 이 limit cycle의 궤적을 따라 영원히 순환한다. 선형인 시스템에서는 limit cycle이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세월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반복되는 기억의 limit cycle이 존재한다면, 세월은 선형이 아닌 비선형 체계인 셈이다. 일반적인 비선형 시스템의 경우 해석해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수치해석으로만 시간에 따른 움직임을 분석할 수 있다. 수식을 통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고,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특정 순간의 상황에 아주 가까워져야만 그때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살아 봐야 안다.




그녀에게 학창시절은 그리운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그녀는 그 시절을 지적 부르주아 계급화가 이루어지는 시간, 자신의 태생으로부터 단절되는 시간으로 여긴다. 로맨틱한 추억들은 비판의 대상이 됐다.
80년 여름 동안, 그녀에게 청춘의 시간은, 그녀가 모든 요소를 차지하고 있는,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현재 자신의 시간으로 품은, 빛이 가득한 무한한 공간처럼 보였다. 그 과거의 세계는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해, 그녀는 처음으로 인생은 한 번뿐이다라는 문장의 끔찍한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여행 전날 밤, 벌써 12년을 함께 한 친구와 술을 먹으며 학창시절에 함께 연주했던 곡들을 들었다. 어떤 곡들은 듣기 전까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고, 익숙하다 생각했던 몇몇 곡들은 기억보다 훨씬 어려워서 도대체 이걸 무슨 자신감으로 했는지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각자 기억하는 타인의 치부를 들쑤시다가 서로의 기억에 불일치하는 지점이 꽤나 많음을 발견한다. 어쩌면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경험을 이어주는 유일한 증거가 음악이라는 점이 이 의문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음악만큼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기록이 세상에 어딨는가.


아무리 추해지더라도 음악을 아예 놓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진심으로 음악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행복했을 그 시절이 그리워서가 아닌지 물어야 했다. 너가 보는 나는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너는 말해줬다. 고마운 마음에 너의 기억을 이제 나의 기억으로 삼기로 했다. 첼로와 1바이올린, 언제나 반원의 양 끝에서 서로를 바라봤던 우리는, 맞물려도 보름달이 되지 못할 한 쌍의 하현달이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한 데이터를 동시에 수정하려는 작업(트랜잭션)들을 충돌 없이 처리하기 위한 세팅값으로 '격리 수준'이 존재하는데, 격리 수준이 높은 경우 한 트랜잭션이 사용 중인 데이터에 다른 작업이 접근할 수 없도록 락이 걸리게 된다. 이때 두 트랜잭션이 서로 락을 건 데이터에 접근하기 위해 무한정 대기하게 되어 DB가 응답하지 않는 상황을 데드락(dead lock)이라 한다. 기억을 수정하다 보면 지금 내가 조작하는 기억과 예전에 믿었던 기억의 차이가 발생한다 - 과거의 기억은 그보다 먼 과거를 참조하기에. 아직 끝나지 않은 과거의 트랜잭션 위에 새로운 수정 요청을 보내는 일, 데드락의 발생 조건이다. 정합성이 깨진 채 멈춰버린 인간의 세월은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한두 번의 오류라면 일일이 문제를 찾아 처리하겠지만, 가끔은 몰래 서버를 내리고 DB 전체를 롤백하고는 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어떤 태초의 모습으로.




그녀는 자주 혼자였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녀가 걸었던 도시의 거리와 그녀가 머물던 방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 루앙의 여자 기숙사, 오페어로 살았던 핀칠리, 방학 동안에 있었던 로마의 세르비오 튈리오 가의 하숙집. 그녀는 그곳에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들이 자신의 자아들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과거와 미래가 뒤바뀐 것이다. 이제 욕망의 대상은 미래가 아닌 과거다: 63년 여름, 로마의 그 방으로 돌아가는 것. 그녀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극한의 자아도취적인 시선으로, 내 과거를 선명하게 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부류의 여성의 모습, 어쩌면 나는 그것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욕망하기에 돌아가게 된다. 돌아가려는 시절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돌아가고자 하는 지점의 모습은 그 시간에 실존했던 현상과는 관계가 없다. 과거에 대해 유일하게 진실된 감정은 '그리움'뿐이다. 과거를 추억한다 생각할 때, 실은 그리움이라는 욕망 자체를 추구하는 것뿐이다. 세월은 역사가 아닌 픽션이다. 돌아가는 것이 아닌 바꾸고자 하는 것, 시제를 잘못 붙인 미래를 돌아보는 것은 시적 허용의 일부다. 그래서 내가 닿는 들판은 언제나 가공의 세계며 타자의 세계다. 형체가 없는 과거의 추억을 자꾸만 구체화하려 할수록 본질과는 멀어진다. 해석은 창작자의 몫이 아니다.


기억을 조작하는 일은 한때는 나와 함께 흘렀을 시간의 숨을 끊는 일이다. 거듭 돌아오는 추억은 풍경화와도 같은 분 시간의 집합이라, 이를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멈춘 시간 속에서 행복했던 적 없듯이. 세월 속 기억의 순환은 이상에 닿지 못하는 절망의 복기다. 따뜻한 고향의 주선율로 돌아오는 듯한 바흐의 푸가도, 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개선하는 베토벤 소나타의 재현부도 아니다. 반복될 때마다 고통스러워지기만 하는, 매번 멀리 떠나지 못하고 결국 돌아오고야 마는 슈만의 론도에 오히려 가깝다. - "슈만을 연주할 때면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그 어디에도 이르지 않는, 줄곧 되돌아오는 듯한, 끝에서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욕망했기 때문에 죽은 것일까, 죽었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일까?"




어떤 행렬이 반복해서 곱해질 때, 그 행렬의 고윳값 중 가장 큰 값(dominant eigenvalue)이 다른 고윳값에 비해 극도로 커져 해당 고윳값의 성분만 유효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RNN 등의 딥러닝 모델을 학습할 때 생기는 gradient explosion / vanishing 현상 중 일부가 이런 가중치 행렬의 고윳값 튜닝 실패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가장 큰 값은 시간에 비례해서 커지고, 그에 비해 작은 값들은 계속해서 줄어들다가 사라지고 만다. 기억이 그렇다. 작은 행복도 불행도 금세 잊혀지고, 세월 속에서 가장 사랑스러워 보이는 기억 하나만 부풀어가다, 마지막에는 원래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커다란 거품만이 남는다.




우리가 오르세 미술관에서 반고흐 그림을 보며 그 순간 맨해튼에서 벌어진 일들을 몰랐던 것은 우리들의 죽음의 순간의 무지였지만, 의미 없이 흘러가는 날들 사이에서 국제무역센터 타워의 폭발과 치과 진료 혹은 자동차 점검을 동시에 내포하는 이 시간만큼은 잊혀지지 않게 됐다. 9월 11일은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해 왔던 모든 날들을 내몰았다. <아우슈비츠 이후로>라고 말해왔던 것처럼 <9월 11일 이후로>라고 말했고, 하나뿐인 날이라고 여겼다. (...)

훗날, 2001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망설임 끝에 8월 15일, 주말에 파리에 내린 폭우, 세르지 퐁투아즈의 캐스데파르뉴의 대량 학살 사건, <르로프트>, <캐서린 M의 성생활>의 출간을 떠올릴 것이고, 그 일들을 9월 11일보다 먼저 생각한다는 것에 깜짝 놀랄 것이며, 이들이 10월, 11월에 일어났던 일들과 전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인정해야만 하는 사건과는 달리, 그 일들은 다시 과거 속을 떠다녔고 자유를 되찾았다.


우리의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오는 충격이다. 멈춘 듯 굳어버린 시간만을 객관적으로 부검할 수 있음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타인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흘러간 세월을 오직 주관적으로 곡해할 수밖에 없음은 그것이 오롯이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이기에 명백한 것이 아니라, 알 수 없기에 나이다. 그렇기에 세월 뒤에 돌아오는 것은 선명한 남의 아픔이 아닌 한 번도 소유해 본 적 없던 나의 기쁨이다. 혹은 기쁨이었기를 바라는 사라진 과거의 무언가. 지금 내게는 남처럼 느껴지는, 거기 존재했던 덩어리의 시간.


훗날, 2021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생각하게 되면 나는 망설임 끝에 경북 영주를 향했던 여름밤의 드라이브, 추석 연휴에 야근을 하게 만든 전 직장의 데이터베이스 오류, 오마이걸의 <던던댄스>와 <Shark>를 떠올릴 것이고, 그 일들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는 것에 깜짝 놀랄 것이다. 기억이란 이렇게나 편리하다. 미화된 자화상에 갇혀 사는 일은 냉정한 세상에 대한 방어기제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확인해야  것이 있었다. 한동안 멈춰있던 나의 시간이 조금씩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후, 일 년 남짓 조용히 가꿔 온 나의 정원의 문을 열 준비를 해야 했다. 그 이전에, 이 정원이 또 다른 남의 들판은 아닐지, 그리움에 발 묶여 돌아온 과거형의 도피처가 아닐지 확인해야 했다. 이곳을 가꾸며 나는 여전히 익숙한 멜로디를 듣고는 했다. 여전히 이 수수한 론도의 A주제를 연주하는지, 나는 차라리 이곳이 코다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생소한 문법의 언어를 하는 도시에서, 나의 정원에는 올바른 시제가 붙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책 한 권이 저절로 써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토양을 안다. 이 흙의 습도와 온기를 알고, 이 공기 속에서 떠다니는 나의 욕망 가득한 기억을 알고, 이를 호흡하며 자라나는 작은 씨앗들을 안다. 아니 에르노의 말대로,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대사가 사라지고, 이미지가 사라지고, 형체 없는 아릿한 감정만이 남은 채 연출된 몽타주로 재구성될 것이다. 지금 이 장면이 또 어느 세월 속에서 메아리치다 사라지기 전에, 나의 부끄러운 언어로나마 간절히 받아 적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네가 결국 부정할 지나간 시간의 흐름 속에, 내가 여기 있었다고.






인용 블록 출처 - 세월 (아니 에르노 저 / 신유진 역)

본문 내 인용 출처 - 슈만, 내면의 풍경 (미셸 슈나이더 저 / 김남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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