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글그림 Jun 19. 2024

마지막 날의 그림







이번 여행은 시작처럼 그 중간도 끝도 계속 예상치 못했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비가 온다고 했는데 비가 오지 않아 맑은 날에 리기산과 루체른을 다녀올 수 있기도 하였고

그 비가 다음 날에 오는 바람에 호숫가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려 했던 마지막 계획은 지킬 수 없게 되기도 했다.


덕분에 자전거 자물쇠처럼 한 번도 쓰지 않고 가져가게 될 줄 알았던 우산을 꺼내 들고 호숫가를 걸었다. 

연일 기온이 30도 언저리를 맴돌며 여름 같기만 하던 날씨가 하루아침에 가을이 되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낙엽이 겨울에 눈이라도 본 듯 반가웠다.


비 내리는 호숫가는 바람 불어 춥고 을씨년스러웠지만 이제 과연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싶은 스위스의 가을을 이렇게라도 잠깐 보고 갈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새삼스럽지도 않게 여행 내내 그림을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 

사실 방명록에도 그림을 그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남아버린 여백이, 쓰이길 기다리는 색연필이,

그리고 이미 다녀간 사람들의 서툴지만 정성스러운 그림들이 나를 그리게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실제 석양은 비구름과 우거진 나뭇잎들로 대부분 가려져있었지만

그림으로 남은 나의 석양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곱게 물들어 있겠지.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내가 그리고 싶어서 그렸던, 여행 중에 남긴 유일한 그림이다.


자동으로 배정된 조금 넓었던 자리를 포기하고 굳이 좁지만 창밖을 볼 수 있는 자리를 선택해서

5년 만에 탄 비행기, 스위스에서 경유지인 아부다비로 가는 동안은 하늘 구경을 실컷 했다.

제법 높이 날고 있었을 텐데 땅이 아이맥스 영화라도 보는 듯 선명하게 보였다.

가상현실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진짜 산맥과 강줄기와 구름들이 와. 정말. 이건 꼭 그려야 해! 그렇게 그리게 된 것이다. 


일기는 비행기를 타기 전과 안에서 있었던 두 가지 해프닝에 대한 글이다.


취리히 공항에서 어떤 동양인 아가씨가 운전하던 캐리어 운반차에 발뒤꿈치를 찍혔다.

순간은 너무 아파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급히 양말을 내려보니 다행히 살갗이 벗겨지지는 않았다.

연신 미안하다고 하셔서, 나는 아프지만 피가 나진 않으니 괜찮다고 했으나 굳은 표정을 풀어 보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두워진 기내에서 내가 아이스티를 건네받다 잔이 미끄러지는 일이 있었다.

황급히 잡아 많이 쏟아지진 않았고 뜨거운 물도 아니긴 했지만 옆자리에 인도계로 보이시는 중년 아주머니의 바지와 선반 주머니 위로 차가 흘렀다.

너무 놀라 I'm sorry를 연발하고 있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웃으시며 괜찮다고 해줬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 

세상은 넓고 선인도 많다.

나도 이왕이면 그중에 한 명이 되고 싶다.


좋은 여행이었다.


아부다비에서 비행기에 불이 안 켜져 2시간이나 연착되긴 했지만 무사히 돌아왔다.


세상은 온통 생각지도 못한 일 투성이고 그래도 꽤 재밌지 아니한가.


가을에 받게 된 여름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던 2023 스위스 여행기 마침.




이전 10화 취리히 공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