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할 때 스위스는 안전한 나라지만 소매치기만큼은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기차에서 트렁크 채 도난당했다는 글까지 보고 나니 역시 자전거 자물쇠는 필수일 것 같아 공구함을 뒤져서 16년 전에 사 두었던 자물쇠를 찾아냈다. 다행히 녹 하나 슬지 않고 멀쩡히 잘 작동했지만 열쇠형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 열쇠를 분실한다면? 더 대책 없어질 텐데? 다시 번호형을 사는 것이 좋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만약을 한참 돌리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전거는 없는데 자전거 자물쇠만 두 개인 것은 좀 웃긴 거 같아 그냥 있던 열쇠형 자물쇠를 들고 가기로 했다.
정 불안하면 기차를 타는 동안 그 열쇠를 꼭 쥐고 있어야겠다 정도의 방안을 떠올린 채.
드디어 바덴에서 주크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2등석인데도 자리가 제법 널찍해서 중형인 내 캐리어는 가진 채로 앉을 수 있었다. 위에 수납할 수 있는 선반도 꽤 넓었다.
검표하시는 역무원이 내 자리로 점점 다가올수록 혹여나 통행에 방해가 되니 올려달라는 주의라도 줄까 살짝 긴장했지만, 역무원은 아무런 말 없이 내 표만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조금씩 튀어나와 있는 캐리어들을 피해 지나가셨다.
결국 자전거 자물쇠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 고대로 들고 돌아왔다.
만약을 위해 가져갔지만 만약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여행자 보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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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기차 타기는 정말 쉽다. 서울에서 지하철 타는 것보다 쉽다.
환승 구간이 일자식 복도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만 알아봤을 때는 종류가 다른 기차가 몇 가지 있어서 지하철 노선처럼 서로 갈아타는 곳이 떨어져 있지는 않을까 여기에 나오는 경로 시간은 환승 구간을 충분히 고려한 것일까 등이 궁금했었는데,
막상 와보니 어떤 종류의 기차든 한 복도에서 게이트 번호로 찾아갈 수 있어 환승 시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구조였다.
작은 역은 그 지하 통로가 지하도 건널목 수준이라면 큰 기차역은 통로가 넓고 지하상가로 꾸며져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 편리한 교통수단에서 내가 경험한 단 한 가지의 단점은 직통을 끊어도 중간 역에서 열차가 분리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16년 전에도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넘어올 때 분리되는 칸에 탔다가 하마터면 국경을 못 넘을 뻔했던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돌아가는 날 주크에서 취리히 공항을 가는 기차에서 똑같은 일이 있었다.
2등석 칸인 것만 잘 확인하고 탔는데 공항역이 아니라 그전 취리히 역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내린다.
순간 등골이 싸해지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설마... 진짜?
하필 공항 가는 날인데. 행여 비행기라도 놓칠까 허겁지겁 캐리어를 끌고 내려서 앞 칸을 향해 엄청 달렸다.
생각보다 더 긴 차량을 지나 드디어 사람들이 있는 칸을 발견해서 올라타고 공항을 가는 것이 맞는지 확인한 뒤 자리를 찾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았는데 다행히 기차가 바로 출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꽤 긴 시간을 정차한 다음에야 출발했다. 나같이 잘 모르고 분리되는 칸에 탔어도 걸어서 운행되는 칸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었을까?
그러니 혹시 누군가 나처럼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멈춰버리는 기차를 탔다면 당황하지 말고 내려서 앞 칸까지 걸어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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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하고 예뻤던 시골 기차역.
카드도 현금도 가능한 기차표 자판기와 함께 지도가 있는 안내판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