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모임에 나갔을 뿐인데 12

와신상담

by 황인섭

나는 원래 개를 키우는 것은 잘 못 됐다고,

인간의 이기심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생명이 갇혀 지내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어느 날 시골동네를 걷다가 친구 녀석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는 개와 인간의 역사를 설명해 줬다.

다른 포유류나 늑대에게서는 발견될 수 없는 유전적 특징을 근거로,

이미 인간과 공생을 전제로 둔 진화가 이루어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 반론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관련 책을 읽어봤다.

‘팻 시프먼 - 침입종 인간’이었는데 친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많은 근거를 볼 수 있었다.

모두 읽고 나니 아예 현생 인류의 정의 자체가

‘개와의 공생을 시작한 인간’

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물론 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정답은 알 수 없다.


같은 인간이라면 알 수 있는 확실한 호의.

내가 느낀 감각이 나를 설득하려고 발악 중이다.

수업에서 적극적이길 독려하는 행동들을 보고 있자면

'신천지인건 맞지만 나를 구원하려는 그릇된 신념만큼은 진심이 아닐까?'

하지만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비관은 낙관이 요란하게 나돌아 다닐 때면 등장해 압도적인 실력을 행사하고 사라진다.


포교대상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포섭인은 센터로 포교대상을 데려간 순간 서로의 포교대상을 보게 된다.

잘생기고 키 크거나 예쁜 포교대상,

혹은 두 명 이상의 포교대상.

거기에 수업 참여가 적극적이라면 아주 자랑스러울 것이다.

도그 어질리티 대회에서 퍼포먼스를 뽐내는 보더콜리 같을 것이다.

그런 마음인 것이다.

차라리 센터장이나 강사들이 나를 더 순수한 포교대상으로 여길지 모른다.


9회 차.

근무시간이 겹쳐 수업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쉽다', '어쩔 수 없다'

등의 대답이 돌아왔지만

'나도 이번에 못 가서 괜찮아'

라는 말은 없었다.


수업 30분 전 기습적으로

'수업에 가겠다'

는 메시지를 남기고 포교센터로 향했다.

예상한 대로였지만 모임장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전담강사가 나에게 단짝은 함께 오지 않았는지 물었다.

자리에 앉아 잠자리처럼 시야각을 넓히고 강의실 뒤쪽에 서있는 전담강사를 살폈다.

전화를 잡고 강의실을 들락날락하는 모습.

모임장에게 급히 전화를 하는 것으로 예상됐다.

모임장은 20분 정도 이후 수업에 도착했다.

"못 온다더니 나보다 일찍 왔네?"

라며 그저 지각한 것일 뿐이라고 어필했다.

그들의 설정상 모임장도 수업을 받는 학생이기에 내가 수업에 오지 않아도 모임장은 수업에 왔어야 한다.

포교대상으로서 포섭인의 근태를 지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올라오는 짜증을 삼켰다.


내 생각대로면 그녀는 이미 여러 번 이 수업과 교리를 배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트에는 도대체 뭘 그렇게 적는지도 궁금했다.

필기하는 내용을 여러 번 쳐다봤다.

어느 순간 옷소매를 늘려 손을 덮고 필기를 하고 있다.

거기서 더 이상함을 느껴 손을 유심히 쳐다보니 왼손 약지손가락에서 글자가 새겨진 반지가 겨우 보인다.

내가 내릴 수 있는 추측은 두 개였다.

'데이트 중에 전담강사에게 전화로 소식을 듣고 급하게 이곳으로 왔다.'

'원래라면 반지를 빼고 오지만 급하게 오느라 반지를 빼지 못했고 그걸 내가 쳐다보는 걸로 착각해 옷소매로 조금이나마 가렸다.'


요즘 사적인 만남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수업시간에 맞춰 센터에서 만나고 끝나면 바로 각자 집으로 향한다.

지금껏 그들의 처절한 행동을 보며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동시에 '손도 안 대고 코 풀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어 괘씸하다.

최소한 나보다는 더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최대한 빨리 보내주기 위해 말을 아꼈다.

수업 후 설문지만 작성하고 센터를 나가 바로 인사를 했다.

딱히 착한 마음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싫다는 사람 붙잡고 있는 나를 보기 싫어서였다.


10회 차.

과음을 하고 점심때가 되어서야 일어나 보니 메시지가 와있다.

- 09:36 am 모임장 "오늘 수업 올 거야?"

보자마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 온다 하면 본인도 안 오려고 묻는 것 같은데..'

"갈 거야"

단호한 대답과 다르게 요즘 수업에 가기 싫은 마음이 크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듣고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해야 한다.

너무 단조로운 상황도 재미가 없다.

그럼에도 가야 했다.

슬슬 죽이 되는 밥이 되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할 생각이었다.


"갈 거야"라는 말에

"일이 생겨서 늦을 거 같은데 끝나고 카페라도 가자"

고 답장이 달렸다.

나는 알겠다고 답하고 수업장소에 혼자 도착했다.

전담강사는 모임장이 늦는다는 소식을 접했다며 본인이 대신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당신이 왜 미안한데'


저번 시간에는 노트를 강의실에 보관했다.

의심을 피하고 싶었고 일부러 철학적인 내용을 적어 내가 유리한 상담시간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번 시간에는 노트가 필요 없어 노트를 다 치워버렸다고 한다.

'굳이?'

그냥 그 자리에 두고 노트가 필요 없다고 하면 될 것을,

아예 치웠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수업은 다행히 빠르게 끝났다.

애초부터 이번엔 수업을 진지하게 들어볼 생각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모임장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국면'을 열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모임장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

"오늘 일이 계속 늦어져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데..."

"못 온다는 거지?"

무응답.

배가 고팠다.

아니 배가 고플 정도로 짜증이 났다.

두더지게임의 두더지처럼 때리려고 하니 쏙 들어가 버렸다.

원래는 오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임장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모른 척 다녀줄지 그만할지 선택하라고 요구하려 했다.

만약 모른 척 다녀달라 한다면 당분간 재밌는 상황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재미도 없는 곳에 시간 내가며 왔는데 그제는 지각, 오늘은 약속 파투?'

그래봐야 당장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쓸개를 빼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쓸개를 씹으며 잠에 들기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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