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기누설
익명의 여럿보다, 이름 붙은 단 한 사람에게 우리는 더 강한 공감을 느낀다.
이 공감은 때로 우리 판단을 왜곡하고,
때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선택으로 이끈다.
인식 가능한 희생자 효과
심리학자들은 일부 피험자에게,
한 아이의 목숨을 살리는 약을 개발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얼마나 기부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다른 일부 피험자에게는,
8명의 아이들을 살리는 약을 개발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얼마나 기부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두 경우 다 비슷한 액수를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 번째 그룹에 속한 피험자들에게는 아이의 이름을 말해주고 사진을 보여주자 기부 액수가 급등했다.
그리고 8명의 아이들보다 1명의 아이에게 더 많은 기부금이 모였다.
'공감의 배신 - 폴 블룸'
곧 스승의 날이 다가 모양이다.
주일예배에서 스승의 날을 미리 기념하여 스승과 관련된 구절을 설교한다고 한다.
제자는 스승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갈라디아서 6장 6절
그는 교회 근처에 부임하기 위해 임용고시를 두 번 치른 청년에 대해 말했다.
신앙과 헌신의 열망이 돋보이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걸리는 점이 하나 있다.
같은 장에서 조금만 앞으로 가면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갈라디아서 6장 4절
이 나온다.
각자의 일을 살피려면 부임된 지역에서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다.
본인이 교회 근처로 부임되면 누군가는 다른 곳으로 부임되거나 탈락할 것이다.
시험을 두 번 보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그 이유가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믿는 것이 잘못됐다.
이런 부분을 예배 이후 식사를 하며 앞사람에게 물었는데,
잠시 고심을 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그래도 나만이라도 구원받았다는 안심이 되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효율적 이타주의를 추종한다.
선한 의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행위가 정말 누군가를 살리는가,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쉽게 말해 빌게이츠는 아프리카 자원봉사를 하는 것보다,
현재 일에 집중하며 100억을 기부하는 것이 훨씬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반면 눈앞에 보이는 문제만 해결하고 상황이 개선됐다고 착각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데,
상황개선은 미비한 데에 비해 광고효과는 요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도와주는 기분에 만족한다.
공감과 선의가 일으킨 착각이다.
그 착각은 때로 아주 위험하다.
눈앞의 감동을 좇다 보면, 진짜 도움은 놓치기 마련이다.
이는 꼭 이타주의뿐만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적용해 봐도 된다.
'빵과 서커스'가 적절한 적용이다.
로마시민에게 주어진 무상으로 주어진 빵과 서커스는 우민 정책의 일환으로,
실상 나아지는 것은 없었지만 권력자를 자비롭게 보이게 했다.
시민들은 당장의 배고픔과 지루함은 견뎠지만 그 세금을 어디서 충당하는지 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OOO이 배농사 살리기로 가공품 만들고 홍보했는데 사실 거기에 배 함유량이 1% 미만이었데”
내게는 1% 미만의 함유량보다 배농가 살리기라는 말이 걸렸다.
“배농가를 살리면 사과농가는 어떡하라고”
“그래서 사과농가 살리기도 해”
친구도 오류를 아는지 멋쩍게 웃는다.
“그럼 오디농가는, 도라지 농가는, 복분자 농가는, 결국 누군가는 파이를 뺏길 거 아니야 “
누군가를 돕는다는 미명 아래 또 다른 누군가는 언제나 빠져 있다.
이건 자선이 아니라 선택적 생존이다.
“몰라, 알아서 살겠지 뭐 “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므로 예술가의 전유물이라 볼 수 없다.
이런 주제는 오래전부터 논쟁을 낳아왔는데,
예술가가 죄를 지었을 때 그걸 본 우리가 감동해도 되는지이다.
칸트였다면 그 안에 담긴 뜻은 창작자의 도덕성과 별개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자가 범죄이력이 있다고 하면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도덕성 없는 창작이 감동을 줄 수 있는가?
목사는 사람들에게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봤냐고 물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거 가톨릭에서 만든 거 아세요?”
“예?!?.....!!!”
가톨릭 제작 영화라는 소식을 들은 신도들은 정말 충격받았다는 듯이 웅성이며 놀란다.
사람들의 반응에 내가 오히려 더 놀랐다.
가톨릭이 만들면, 예수의 고통이 덜한가?
진리는 그런 식으로 소속에 따라 바뀌는가?
내가 교회를 방문하면서 가졌던 것 의구심 또한 창작자의 도덕성이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히 있다.
이웃사랑, 평등주의...
이런 교훈들에 감동하려다가도,
종말론과 전쟁옹호, 선택받은 민족 같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기대가 무너진다.
아무리 좋은 교훈들은 갖다 붙여도 성경의 결말은,
선택받은 자를 제외한 모두는 불에 타 죽는 결말이다.
하나님은 선한 게 맞는가?
기독교의 사회적 이미지는 어떨까?
대중에 퍼져있는 개독, 예수쟁이 같은 멸칭으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나쁘다.
이유로 몇 가지 뽑을 수 있는데,
무분별한 전도행위, 본인들만 천국에 간다는 선민의식, 타교도를 비난하는 행위 등이 있다.
각각이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종교가 싫어지게 하는 치명적인 이유다.
그 실상을 직간접적으로 본 사람은 싫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교회를 다니며 배우다 보면 무언가 타개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다닐수록 나까지 그들을 싫어하게 됐다.
사람도 교리도 잘 이해하면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는 내 사상이 무너져갔다.
'모든 종교는 선한 철학을 담고 있지만 잘못 받아들인 일부 때문에 안 좋게 보일뿐이다'
라는 생각은 이렇게 전환됐다.
'기독교만은 다른 종교와 달리 결국 자기들만 천국에 가고 싶은 지독한 욕망의 종교 아닐까?'
가끔 무언가 의문을 생각하다가 그 의문이 풀렸을 때의 통쾌한 전율이 있다.
이번에는 꽤 큰 규모다.
1. 온갖 성스러운 말들을 가르쳐놓고 결국 불신지옥이 성경의 결말인가?
2. 이웃을 사랑하라 해놓고 종말의 때가 되면 이웃이 불지옥에 빠지는 걸 관망하라는 말인가?
3. 구원과 영생 같은 지독한 욕망을 품어도 된단 말인가?
아니었다.
1. 신의 간절한 바람은 종말의 때에 결국 모두가 화합하는 것이다.
2. 이웃이 죽는 걸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뛰어들어 구해야 한다.
3. 구원과 영생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포기해버려야 한다.
신은 처음에 아담과 선악과를 통해 너희는 악인이라 말했다.
나중엔 예수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받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종말엔 구원조차 버리고 진정한 의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머니가 신앙으로부터 배신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자살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어머니였기에,
극심한 병의 고통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시련이라 여겼을 걸로 유추했다.
솔직히 나도 배신감이 들었다.
괘씸하다고도 생각했다.
9살의 자식을 두고, 본인 신념이 무너진 걸로 자살을 한단 말인가?
진실은 알 수 없겠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살던 집에서 조차 쫓겨나 친척집을 일주일씩 전전했다.
없는 와중에 빌리던 빌어먹던 어렵게나마 상황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고민했을 것이다.
내 신앙을 지키느냐. 가족의 짐을 덜어주느냐.
어머니는 결국 구원도 영생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하는 선택을 했다.
지나고 나서 보면 안 그랬어도 그 위기는 넘겼을 확률이 높다.
친가, 외가 친척들이 있었고 정 안 되면 사채를 쓸 수도 있다.
아주 미약한 보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미약한 보탬이 되기 위해 본인의 삶을 지배하던 신앙을 버린 것이다.
결론.
정말로 예수가 재림하고 종말의 때가 오던.
각자 삶에서 종말이라 여길 때가 오던.
가족이나 이웃이 지옥에 빠지려고 한다면 구해야 한다.
내가 지옥에 빠질지언정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그러다 같이 지옥에 빠질 지라도 가야 한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종말에 이렇게 말하기를 바라본다.
"예수님, 그냥 다시 올라가세요. 저는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는 걸 도저히 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이 지옥 같은 현실에 남겠습니다."
https://youtu.be/Ke_WDIR6lgc?si=EPyShgFrgXvZmVH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