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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니 Aug 23. 2023

누가 소년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숙제를 자주 빼먹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필기하고 질문이 많은 학생.

나에게 T는 여러 학생들 사이에서 딱 그만큼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여럿이 함께 공부하는 단체 수업의 구조상 학생 개개인의 학습 능력에 맞추기란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었고, 어머님과의 상의 끝에 T와 나는 1:1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저는 지금 당장의 성적은 낮지만 2년간 열심히 해서 SKY를 가겠어요!"

전교권에서 노는 친구들도 꿈꾸기 힘들다는 대학을 가열차게 희망하는 그의 열정에 감복하여 나는 틈나는 대로 보강을 잡았다.

T의 출석은 만점이었다.

주 3,4일의 수업이 버거울 법도 한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처음의 불길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우리의 수업은 점차 삐걱대기 시작했다.

느슨해진 수업의 분위기를 팽팽하게 당겨보고자 곁들이는 일명 스몰토크의 비중이 점점 커졌던 것이다.

늘 그렇듯, 나는 주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입장에 있는데 T가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게임, 대학, 가족'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족에 관하여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적에는 '아이가 쌓인 울분이 많은 것 같은데 이 부분을 조금이나마 어머님께 전달을 드려야 하나' 걱정이 될 정도로 내재된 억압적 감정이 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다소 상기 돼 보이는 T의 모습에 나는 단순이 바깥 날씨가 더운가 보다 싶어 에어컨의 온도를 낮추고 수업에 들어가기 앞서 간단한 안부인사를 건넸다.

"아 제가 오늘 기분이 별로라서요, 솔직히 수업할 기분이 아닌데 왔거든요. 진짜 공부하고 싶지 않은데... 일단 수업 시작하세요"(T의 화법은 항상 이러하다. 존댓말의 종결어미를 취하고 있지만 "필기가 안 보이니까 저리 가보세요" "잠깐 말 좀 멈춰보세요"와 같이 명령에 가까운 말들을 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도를 나갈 테니 정이 힘들면 말해달라고 한 뒤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T는 도통 집중하지를 못했고 급기야는 (나를 바로 앞에 두고) 충격적인 혼잣말을 읊조렸다.

"뭐라는 거야 씨x....알아쳐먹지도 못하겠는데 혼자서 계속 나불대네 아 나 진짜 씨x...."

마스크 너머로 들리는 소리라 모든 말을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둘만 있는 공간에서, 그것도 수업 중에 학생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너무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너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니? 이해가 안 되면 어느 부분을 모르겠다고 말해야지 그런 혼잣말을 하면 어떻게 해?"

"들렸어요? 그냥 진짜 혼잣말인데"

"응 다 들렸어. 그러지 말고 말을 해 어디서부터 다시 하면 좋을지"

20분 전, 수업 초반으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진도를 나가기 시작했지만 T의 욕설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커져만 갔고 심지어는 책상을 발로 차면서 격앙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잠시 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잠시 쉬어야겠다며 T는 교실을 나가버렸다.


막막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면전에 대놓고 쌍욕을 듣는 경험이 처음이라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T는 15분이 넘어서야 들어왔고, 이제는 아예 책을 볼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핸드폰 넣고 수업하자는 말이 세 번 정도 반복될 때쯤, 신경질적인 T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씨x 그냥 좀 냅두라고요. 어차피 쌤은 두 시간 채우고 돈 받으면 그만이잖아요. 나도 여기 두 시간 채우고 집에 가면 그만이니까 그냥 좀 각자 있다가 빠이빠이하자고요.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먹지? 이해가 안 되네"

"우리가 각자 시간 보내자고 만나는 사이니? 너랑 나랑은 공부라는 목적을 가지고 만난 거잖아. 근데 각자 두 시간 채우고 갈 길 갈 거면 우리가 왜 여기 있니? 차라리 너도 피시방을 가서 그 시간을 보내는 게 낫지. 나는 네가 하자는 대로 못하겠으니까 수업 안 들을 거면 나가, 집에 가!!"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까지 떨렸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는 마음에 그렇게 소리쳤다.


"하.... 집에 가라고요? 우리 집에는요... CCTV가 4대나 있어요. 그 카메라들이 계속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요. 내가 숙제 다 하고 잠깐이라도 컴퓨터 할라 고치면 바로 전화가 와요. 회사에서 감시하고 있던 엄마한테서요. 그러고는 숙제 다했으면 다른 공부해야지 지금 뭐 하냐고 소리소리 질러요. 학원이라도 가면 그딴 전화는 안 오니까 여기 와서 게임 좀 하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됐어요?!"

"버거우면 부모님께 말씀을 드려. 힘들다고. 그리고 학원이나 과외를 줄여. 그게 낫지 지금 이게 뭐야. 너랑 나랑 여기서 이렇게 언성 높이고 싸워서 뭐 하냐고"

"내가 안 해봤을 것 같아요? 내가 힘들다고 하면 우리 엄마랑 아빠는 나보고 네가 뭐가 힘드네요. 나가서 돈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데 뭐가 힘드냐고 그래요. 그러면서 맨날 내 뒷바라지하느라 본인들이 더 힘들다고. 근데 내가 공부도 못해서 보람도 없다고 소리 질러요. 나중에 엄마아빠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 않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데 뭔 얘기를 더하라는 거예요?!"

더 이상의 설전은 감정의 소모만 불러오겠다는 생각에 '일단 이 공간에서는 나가달라'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해야 했고 그날의 수업은 우리의 마지막이 되었다.



아이가 나와는 다시 안 보면 그만인 사이지만, 부모님과는 그럴 수 없으니 수업이 정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는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상황을 다시 꺼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들었지만, T의 부모님도 아셔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최대한 간결하게,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일어난 사건 위주로 전달을 드렸고 뒤이어 돌아온 어머님의 대답은 나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다른 애들처럼, 요즘 우리 애가 공부 스트레스가 심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중요한 시기고, 우리는 그래도 좋은 환경에서 애들 서포트한다고 최선을 다한다고요. 안 그래도 요즘 독서실 간다고 나가서는 새벽 두세 시나 돼야 들어오길래 뭐 하고 돌아다니나 벼르고 있었는데 그놈에 게임이 문제네요.... 아니 근데..... 지금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수업 중에 애랑 그렇게 얘기하고 쉬는 시간도 오래 가지고 그랬다는 건, 그날의 공부를 거의 안 했다는 거네요...? 당연히 진도도 못나가셨을 거고.... 아니 수학 선생님도 애 하나 못 잡아서 쩔쩔매던데 왜 다들 그러시는지.... 좀 속상하네요"

할 말이 없었다.

속상하셨다니 사과라도 드려야 하나.

죄송하다는 말까지 바라지는 않았어도 '애 하나 잡지 못해서 진도도 못 나가는' 사람으로 인식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통화 이후, 나는 T에게 원망이 가득 담긴 메시지를 받아야 했다.

'선생님 때문에 저는 또 혼났고, 핸드폰도 뺏기게 생겼으며 외출금지까지 당하게 됐다. 나는 내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솔직한 내 감정을 말한 건데 그게 그렇게 벌을 받아야 할 일인가? 학생 한 명의 인생을 이렇게 망쳐놓으신 기분이 어떤가. 나는 또 부모님께 불려 가 혼이 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정말 내가 잘못한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T를 그렇게 분노하게 만든 건 누구일까?

어른이 돼서 이성적이지 못하고 아이와 똑같이 감정적으로 대응했던 나일까?

집 안에 CCTV를 4대나 설치하고 회사에서 아이를 노려보며 부끄러운 자식이 되지 말라고 소리 지르던 그의 부모일까?

매번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성적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던 그 자신일까?


1년 전,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나에게 작지 않은 상흔으로 남아있고 그만큼의 큰 씁쓸함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그때의 T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내내 마음에 걸린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너는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라는 말.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는 거창한 말까지 못 하더라도 적어도,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는 것이, 자식으로서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위는 절대 아니라는 말.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T에게 꼭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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