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특성상 아이들을 소수 혹은 1:1로 만나는 경우가 많기에 자연스럽게 부모에게도 말하지 못한 10대 아이들의 속사정을 듣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때로는 학부모님께서 먼저 이런 말씀을 주시기도 한다.
"오늘은 수업보다 아이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주로 가지셨음 좋겠어요. 아이가 요즘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제게는 통 말을 안 하려고 해요"
이럴 때 내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그저 들어주는 것.
단, 리액션이 너무 크면 안 된다.
아이들이 털어놓는 이야기 중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랍거나 안타까운, 때로는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너무 큰 리액션은 되려 그들의 입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적절한 공감을 섞어서, 그래도 아이들이 최대한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곳에 그중에서도 한동안 짙은 여운이 남았던 몇 가지 이야기를 풀어내보려고 한다.
1. P의 이야기
얼굴도 훤칠하고 성격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무엇보다 전 과목 평균 90점대를 유지하는 P를 가르쳤을 때의 이야기다.
여느 중학생과 다를 바 없었지만 또래 아이들에 비해 굉장히 착하고 일명 중2병이라 불리는 중증의 허세도 없는 친구라 매 수업시간마다 꽤나 수월하게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연년생인 동생과 달리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매 학기 반장을 도맡아 할 정도로 교우관계도 좋은 아이였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여 과학고를 준비 중이라고 했고, 어머님도 꽤나 열성적인 분이셨다.
나는 2시간 수업 기준으로 중간 10분 정도는 쉬는 시간을 가지는데 P의 경우, 집중력이 좋은 편이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연강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말고사 시즌이 끝나고 시험지 리뷰를 하던 날, 뭔가 고민 있어 보이는 얼굴과 쉽사리 집중을 못하는 그의 태도가 신경 쓰여 이유를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공부가 너무 싫어요, 이 집이 너무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
의외였다.
아이는커녕 결혼 생각도 없던 그 시절의 나에게 '나중에 이런 아들 있으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생각이 들 정도로 P는 훌륭해 보였기 때문이다.
"공부가 좋아서 하는 친구가 어디 있어, 대학을 목표로 하니까 해보는 데까지 하는 거지"
"네, 그렇죠 근데 전 대학을 갈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예요"
충격이었다.
과학고까지 노려볼 수 있는 성적의 친구가 공부가 싫고 대학에 갈 마음이 없다니.
조심스레 이유를 물었다.
"저는 기타가 좋아요. 학교 밴드부에 속해있는 이유도 기타가 진짜 좋아서 그래요. 제 삶에 유일한 낙은 밤에 가족들 다 잘 때 기타랑 헤드셋 연결해 놓고 미친 듯이 치는 거 그거 하나예요"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스트레스 풀면서 공부하면 되겠네, 선생님이 듣기에는 아주 좋은 취미 생활 같은데?"
"아뇨, 저는 기타만 치고 싶어요. 엄마는 제가 지금 공부가 싫어서 그러는 거라는데 저는 기타가 진짜 좋아요. 공부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그냥 기타 자체가 너무 좋은데, 점점 할 일이 많아지고 공부할 거리가 쌓이니까 밤에 기타 칠 시간이 줄어드는 거예요. 그래도 포기 못하겠어서 잠자는 시간을 줄였더니 하루종일 몽롱하고. 학원 가면 집중을 못하고, 그걸 엄마도 알고. 그게 너무 짜증 나요"
사실 그즈음 P의 수업 태도가 전과 다르기는 했다.
수업시간에 자주 졸린 듯한 모습을 보이고 멍해 보였다.
단순히 시험 준비로 누적된 피로와 성장기 아이들의 호르몬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때그때 아이의 컨디션에 맞추어 수업을 진행했는데 실상은 그러했던 것이다.
기타가 좋다고 말하는 P의 눈빛이 너무나 빛나서, 너무나 진심이라 섣불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솔직한 마음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같이 상의드려보는 게 어떠냐는 나의 말에 P는 이렇게 말했다.
"말했어요. 엄마가 뭐가 문제냐고 묻길래 공부하기 싫다고, 진짜 싫은 건 아닌데 할 게 너무 많으니까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스트레스만 받는다구요. 나는 과학고 이런 거 가기도 싫고 생각도 없다고요. 그랬더니 엄마가 뭐라는 줄 알아요...? 정 기타가 치고 싶고 공부가 하기 싫으면 원하는 대로 하래요. 근데 그럼 엄마는 죽고 싶을 거래요. 엄마는 내가 삶의 전부인데 엄마가 바라는 대로 못 크면 엄마는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를 것 같고 죽고 싶을 것 같대요"
정말 뭐라 말을 해야 할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서웠어요. 엄마가 나 때문에 죽는다고 하니까. 엄마는 내가 공부할 때 보람차고 행복하다고 했는데, 엄마가 지금 노력하는 것도 다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했는데 내가 엄마 행복을 망치고 심지어는 그런 마음까지 들게 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말이 안 나왔어요"
나 또한 아이들의 성적 향상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맡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꼭 대학에 가야 한다거나 성적이 다른 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솔직한 나의 의견을 말했다.
"이건 선생님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말하는 거야. 니 인생이야. 한번뿐인 니 인생. 지금 너의 상황에서 최선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보다 적절하게 둘 다 하는 거야. 물론 지금처럼 밤잠을 줄여가면서 기타를 치는 건 누구에게도 좋지가 않으니까, 지금은 과학고 진학을 자연스레 포기할 수 있게끔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공부하고 그 이상의 노력은 하지 마. 네가 정한 그만큼만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보상으로 기타를 치는 거지. 쉽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의 고집은 부려도 된다고 본다. 지금처럼 산송장 같은 얼굴로 3년을 보내느니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서 둘 다 하는 거야. 그게 똑똑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P와 같은 학년의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의견은 절대적이다.
자기 색깔이 아주 강한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특히나 '순하고 착하다'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경우 자신과 부모님의 의견이 대립하면 결국 어른들의 말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 때문에 엄마가 우울증에 걸리고 죽을까 봐 걱정되어 간절히 원하는 걸 포기하고 필요도 못 느끼는 무언가에 굴복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이 시기에 내린 P의 선택은, 앞으로 그의 인생에 있어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그의 선택이 8 할인 삶을 살았으면 했다.
이후에 P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인사도 없이 종강되었기 때문이다.
수업 종간을 맞고서 나눈 카톡에서 그는 '선생님 말대로 노력해 보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을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그때 그는 어떤 선택을 내렸을지 이따금씩 궁금해진다.
부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를.
삶의 주행에 있어 본인이 핸들을 잡고 운전하고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