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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김미 Jun 29. 2024

중단된 소비 습관

비우는 연습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엄마의 도움 없이는 저금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스스로 저금을 하지 못했다. 허구한 날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 썼고, 엄마에게 들킨 날에는 혼쭐이 났다. 피아노 위에는 커다란 돼지 저금통이 있었다. 1년 내내 바닥만 겨우 채웠는데 결국 배를 째버렸다. 500원 주고 산 용돈기입장은 딱히 도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써야 할 돈 아니야?'


그날의 지출을 자신만만하게 기록했다. 사고 싶은 게 있어도 참는 동생과 달리 나는 용돈 받는 날만 기다렸다.


대학에 입학 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 시급은 5210원, 하루에 4시간만 일하면 충분히 용돈벌이를 할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덕분에 한 달 용돈 7만 원이었던 19살과 알바하는 20살의 지갑 사정은 달라졌다. 밤에 치킨이 먹고 싶으면 주저 없이 주문했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알바비를 탈탈 털었다.




폰에서 알람이 울린다. 벌써 저장공간을 다 썼는지 휴대폰을 비우라고 한다. 안 쓰는 어플이라도 삭제하려고 화면을 휙휙 넘겨보니 구석에 단골 어플들이 모여있었다. 한 번 접속하면 몇 시간 동안 끈질기게 붙잡던 녀석들이다. 물론 이민후에 이 어플들도 단골손님을 잃었다.


그렇다고 소비습관이 극단적이진 않았다. 다행히 할부와 빚으로 허덕이는 흥청망청의 소비는 아니었다. 명품 화장품과 가방을 좋아했지만 적당한 선에서 소비했다. 그리고 주로 가성비와 가심비 둘 다 사로잡는 것에 돈을 썼다. 저금을 못하던 10대 때와는 달리 성인이 되어서는 저금하는 힘도 생겼다. 물론 저금했다는 보상심리를 들먹이며 불필요한 소비를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 살 때는 돈을 안 쓰면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매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고 싶었고, 배달에 쓰는 돈은 행복한 지출이었다. 서점에 간 날에는 읽지도 않을 책을 구매했고, 옷가게에 들어가면 쇼핑백을 2-3개 들고 나왔다. 가족들을 생각하면 뭔가 하나라도 더 사주고 싶었고, 지인들과 밥을 먹을 땐 먼저 카드를 내미는 게 속 편했다. 가계부를 보며 혹시나 멍청 비용이 있는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나의 소비습관에는 특이점이 하나 있다. 수입의 일정 금액을 저금한 후 나머지 돈을 아낌없이 써버렸다. 대신 나를 위한 소비만이 아닌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소비했다. 주로 남자친구와 가족들에게 말이다. 알바를 하며 받은 월급으로 여동생들에게 최신형 아이폰을 사주고, 화면이 작아서 눈이 아프다는 엄마의 말에 쿠팡으로 휴대폰을 주문했다. 장거리연애가 끝난 뒤 한국에 오는 남자친구에게 짐을 챙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왜냐하면 사계절 옷부터 신발, 가방 그리고 외투까지 다 사주고 싶었다. 전자기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마트 워치, 무선 이어폰 그리고 프로그래머들이 쓰는 비싼 노트북까지 구매 리스트를 전부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남자친구에게 최선을 다해 소비했다. 심지어 그에게 신용카드와 체크카드도 손에 쥐어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와 결혼한 게 참 다행이다. 만약 헤어졌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무튼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그렇게 돈을 나눠 썼다.




소비습관을 끊어낸 계기는 이민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적절한 문구인가 싶지만 이곳은 모르는 것 투성이라 소비조차 즐기지 못한다. 집 밖에 나오면 마트 하나와 작은 상점들이 모인 건물이 전부다. 동네 중심가에 옷과 신발가게가 있지만 공짜로 줘도 입고 싶지 않은 것들 뿐다. 독일에 와서 1년간 구매한 옷이 빈티지 가디건 하나뿐이라니 스스로도 놀랍다.


어찌 보면 강제로 시작한 소비 단식이다. 배달도 없고 외식도 비싸서 집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근처에 예쁜 카페도 없어서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직접 내려먹거나 믹스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가족과 멀리 떨어지는 바람에 생일과 특별한 날이 아니면 돈을 쓸 일이 없다.


매달 몇 백만 원씩 결제되던 신용카드는 홀쭉하게 줄어 있었다.




물론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하루 만에 배송되는 아마존이 있고, 베를린에 가면 퀄리티 좋은 옷가게가 줄지어 있다. 하지만 선뜻 고르질 못한다. 소비를 하려고 할수록 아까운 마음이 든다. 구경하다가도 내가 무엇을 고 싶어 하는지를 모른다. 여전히 이곳이 익숙하지 않은 걸까.


소비가 중단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30살 졸지에 백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백수가 됐다는 건 더 이상 수입이 없다는 이야기, 즉 쓸 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평론가인 윌 로저스가 이런 말을 했다.

'돈을 절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벌지 않는 것이다.'


 물론 소비를 하지 않기 위해 갑자기 백수가 됐다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로저스의 말은 돈을 벌면 쓸 유혹이 생기기 때문에 돈을 벌지 않는 것이 돈을 절약하는 법이라는 역설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 또한 믿었던 수입이 사라지니 자연스레 돈을 절약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예전처럼 돈을 벌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침대에 누울 때마다 몰려드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 이제 무소비라는 이 새로운 습관이 마음에 들려한다.




짠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싱크대에서 수세미와 세제를 둘 받침대를 찾고 있었는데, 다이소에서 5천 원이면 살 물건이 독일에서는 최소 15000원부터 시작했다. 결국 과일이 들어있던 플라스틱 통을 대신 사용했고 틈만 나면 아마존을 기웃거렸다. 결국 1년째 구매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지난달 한국에 간 김에 다이소에서 사 왔다. 소비는커녕 이렇게 짠순이가 줄이야.

한 때는 배달의민족 계급이 높아진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식비를 줄이기 위해 주말마다 도시락을 챙겨서 나들이를 간다. 그리고 1년간 단 한 번의 배달주문도 없이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집밥만 고집하고 있다. 옷 쇼핑도 마찬가지다. 쇼핑거리를 지나가도 의식적으로 옷가게에 들어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이쇼핑이 목적이지만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소비욕구가 살아날 게 뻔하다.


살아갈 날들을 위해 저금이 중요한 만큼 생활 속 절약도 잠재적인 가치가 있다. 무심코 낭비할 수 있는 지출을 막아주고, 적은 금액이라도 실속 있게 쓸 수 있다. 없으면 안 될 줄 알았던 아이템도 없이 살다 보면 생각보다 괜찮다. 처음에는 절약한 금액이 소소한 금액일지 몰라도 쌓이다 보면 통장에 0이 하나 더 붙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다시 한국에 가면 요요현상이 발생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중지된 이 소비습관이 좋다.


무소비, 꽤 괜찮은 지출이에요.


이번 주말도 외식대신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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