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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김미 Jul 01. 2024

다툼 후 입을 꾹 다문 건

회피라고 생각했나요

바스락거리는 이불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반쯤 감긴 눈으로 톡톡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시간은 오전 8시 반, 평일과 주말의 경계선이 사라진 나의 일상과 달리 그에겐 늦잠을 자는 황금 같은 주말이었다. 슬며시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한참을 휴대폰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세수를 하고 샌드위치를 만들러 부엌에 갔다.


때 마침 화장실 타일에 남은 석회자국이 생각났다. 화장실이 빈 틈을 타 청소를 시작했다. 물과 트리오를 섞어 수세미로 박박 긁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건식 화장실이다. 물을 뿌릴 없는 대신 욕실 세정제를 뿌렸.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줍고 타일부터 청소했다. 른걸레로 닦고 나니 금세 바닥이 반짝거렸다. 세면대와 선반, 그리고 변기까지 깨끗이 청소한 뒤에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일요일인데 쉬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사실 언제 청소를 하던 나에겐 똑같은 하루다. 물론 독일에서는 일요일에 조용히 하는 것이 암묵적인 원칙이다. 하지만 우리 건물은 좀 다르다. 일요일에도 위층은 쿵쾅거리, 아랫집은 소리를 지른다.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바닥 타일과 장판에 쌓인 먼지가 눈에 밟혔다. 자주 청소기를 미는데도 타일이 남색이라서 흰 먼지가 쉽게 눈에 띄었다. 안방에서 청소기를 꺼내 눈에 보이는 먼지를 빨아 당겼다. 그때 남편이 방문을 열었다.


'일요일에는 쉬어. 내일 내가 할게.'


다시 한번 청소를 만류했다. 청소를 다는데 왜 이리 말리는 건지 갑자기 짜증이 났다. 다시 청소기를 미는 순간 그가 청소기를 빼앗았다. 힘의 반동 때문에 청소기를 잡고 있던 손이 튕겨버렸다.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청소하라고 바가지를 긁다가 싸우면 이해되지만, 청소를 말리다가 다툰다고?

짜증 게이지가 상승한 나머지 힘껏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화가 나면 문을 세게 여닫는 습관을 고쳤다 생각했지만 그대로였다. 결국 남편에게 나쁜 습관을 보여줬다. 그가 조심스래 다가왔다.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를 건넸지만, 내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민 후 남편의 외벌이가 시작되었다. 따로 가사분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남편은 주로 설거지와 빨래를 개고 나머지 청소는 내가 맡았다. 사실 집이 작아서 청소라고 할 것도 없다. 청소기 밀기, 선반 먼지 털기, 그리고 화장실 청소가 전부다. 남편은 보통 재택근무를 하지만 수요일에는 출근을 한다. 그 일정에 맞춰 수요일을 대청소 날로 정했다. 일요일 청소는 손꼽는 일이었는데 하필 그날 감정이 상해버렸다.


우리 부부는 화내는 방식도 화를 푸는 방식도 다르다. 그는 단호하게 화를 고, 화가 나도 30초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감정 기복이 크지 않아서 금방 풀고 상대방의 사과도 얼른 받아준다. 굉장히 뒤끝 없는 성격이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나면 입을 꾹 다문다. 싸운 뒤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회피형 인간이라고 하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다. 화가 날 땐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킨다. 물론 상대방이 답답해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회피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웬만하면 넘어갈 일들을 매번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화가  회피하는 것이다. 분노 직후에 대화를 하면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상대에게 못된 말을 할 것 같다. 그래서 혼자 삭히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어릴 때 스스로를 분노 조절 장애라고 생각한 적이 있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다. 겉으로는 삐져서 입을 다문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 중이다. 어떤 포인트에서 화가 났는지 앞으로 어떤 대화를 할지 고민한다. 특히 화가 난 이유를 명확하게 찾아야 한다. 그냥 청소기를 뺏어서 화가 난 건지, 아님 또 다른 원인이 있는지 골똘히 생각한다. 침묵의 시간을 빨리 끝내고 대화를 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남편은 이리저리 눈치를 본다. 아무리 사과하고 대화를 시도해도 와이프는 입을 열지 않는다.


이번엔 6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어떤 대화를 할지 결정을 내린 후 남편을 불렀다. 단지 청소기를 뺏어서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 청소를 안 하는 사람이 말리니까 더 짜증이 난 것이다. 저 틈사이 먼지는 누가 제거하냔 말이다.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언제 화장실 청소를 했는지 물었다. 배수구에 낀 머리카락을 뺀 것만 기억했다. 당신에게 청소를 시킨 것도 아닌데, 어떤 부부가 청소를 말리다가 다투냐고 되물었다. 물론 그가 만류했을 때 청소를 멈췄으면 좋았으려 만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생각이 정리된 후에는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특히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를 하기 때문에 더더욱 말을 조심하게 된다. 남편은 화가 나는 상황에도 이성을 유지하고, 다툼 직후에 화해하려 하지만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짜증 섞인 눈물부터 흘렸을 것이다.


때로는 둘 다 회피형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한 사람이 대화가 준비됐을 시점에 다른 한 사람은 들어줄 준비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직 맞춰갈게 많은 초보 부부지만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회피는 최대한 짧게, 사과는 최대한 빨리.'


서운하면 얼굴에 다 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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