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할 제목
첫째 아이가 아장아장거릴 무렵 친구들이 먼 거리를 움직여 우리 집에 방문해 주었다. 감사한 마음에 맛있는 음식과 술을 준비하여 조촐하게 대접하였다. 그간에 풀지 못했던 회포를 한 창 풀어갈 무렵 술이 모자라 맥주를 추가하였는데 그날따라 맥주 오프너가 안 보였다. 한 참을 찾다 찾지를 못하여하는 수없이 가위 뒤쪽의 톱날 부분을 이용하여 병뚜껑을 잡고 들어 올렸다. 술이 취해서 그런지 여간해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억지로 힘을 더 주어 '훅' 하고 땄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병목이 부러져 떨어져 나갔다. 순간, 오른쪽 엄지손가락 안쪽 마디가 후끈거렸다. 가로 1.5센티미터 정도의 피부가 찢어지고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 허둥 데었다. 다행히 근처에 종합병원이 있어 손가락을 거즈로 움켜쥔 채로 냅다 달려 응급실까지 갔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렸는지 지 손가락이 더욱 아파왔다. 늦은 시간 응급실 안에는 환자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의료진도 많아 보이지 않았고 나를 보러 오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없었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아픈 듯, 느린 접수와 보이지 않는 의료진으로 인해 대놓고 친구들 앞에서 투덜거렸다.
잠시 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응급실로 급히 들어왔다. 한 남자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는데 수건에 피가 흥건히 배어 있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다친듯했다. 이 남자도 들어오자마자 '머리가 아파 죽겠다며, 의사 어디 있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 깨진 사람 앞에서 손가락 한 군데 찢어진 것 가지고 투덜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전히 손가락이 욱신 거리고 아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 다친 남자가 여전히 소리 높여 투덜대고 있을 무렵, 다시 응급실 문이 열리고 환자 이송 침대 위의 할머니 한 분과 119 대원들, 그리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응급실 안쪽에서 응급처치 중이던 의사와 간호사가 뛰쳐나와 이송 침대에 누워있던 할머니를 안쪽 침상으로 안내하고 커튼을 닫았다. 함께 온 남자분은 말없이 천장을 쳐다보았고, 여자분은 '끄윽, 끄윽' 흐느꼈다.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할머니는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가족들 같았다. 손가락을 다친 나와 친구들도, 머리가 아프다고 투덜대던 남자와 지인들도 어느덧 입을 다물고 숙연해진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몸뚱어리 한 군데 아픈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한 것을 마주하고 계신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최근 오십견으로 왼쪽 팔이 잘 안 올라가고 무릎도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손마디는 가끔 삐걱거리고 어깨 근육이 뭉쳐 아프기도 하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 구시렁거리다가도 그때 그 시절의 상황이 떠오르면,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단어보다 더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단어가 있을까.
최근 내 휴대폰으로 부고 소식이 많이 날아들고 있다. 00 집사님의 모친, 00 권사님의 부친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이다. 90대에 눈을 감으셨으니 누가 보면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겠으나 유족들에게 할 소리는 아닐 것이다.
살다 보면 내외적으로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많이 겪게 된다. 때로는 인간관계로 인해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있고, 일이 잘 안 풀려 짜증이 솟구칠 때도 있다. '저 인간 말종과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아!', '내가 여기 아니면 일할 곳이 없을 줄 아나!' 내 속에서는 거침없는 불만이 터져 나올 때도 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심호흡 한 번 길게 하고 깊고 푸른 하늘을 잠시 마주하고 나면,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고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도 일 없이 집에서 놀 때보다는 지금이 낫지 않은가. 머리가 깨져 병원에 누워 있는 것보다는 팔다리 멀쩡한 지금이 낫다. 급전이 필요할 때 혼자 뛰어다니며 돈을 구하는 것보다 내 뒤에서 신용보증이 되어주는 든든한 직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삶이 절망적으로 느껴지거나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이로 인해 '나쁜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가고 있음을 느낄 때, 병원의 응급실을 한 번 방문해 보라.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단 하루'라는 시간을 간절히 갈구하고 있는 사람의 눈빛을 확인해 보라. 이 후로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은혜이고 모든 것이 감사할 조건들로 보일 것이다.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그 고통이 내 삶을 '불행'이라는 종착역으로 이끌어 가도록 내버려 두기보다는, 오히려 억지로라도 '감사'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인 기운으로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 보면 좋겠다. 엉망진창의 상황이 예상된다 할지라도 부정적인 생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보다 더 최악의 장면을 만나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그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해 보자. 감사가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소소한 것부터 감사를 표현하는 연습을 실천해 보자.
오늘도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학업에 임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오늘은 새벽 기상에 대한 스트레스를 벗고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있음에 감사하다. 청소 안 한다고 잔소리하는 아내가 건강하게 내 곁을 지켜 주고 있음에 감사하다. 블로그 포스팅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음에 감사하다. 감사가 감사를 낳을 수 있는 상황에 더없이 감사하다.
내일도 감사할 일들이 넝쿨째로 굴러들어 올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감사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