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은 첫인상일 뿐.

따스함이 묻어 있는 와인매장

by 다소니Rino


-정주연-


정신없는 첫 출근은 어느덧 퇴근 시간을 알려왔다. 주연은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숨 가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얼마만이지. 몸이 이렇게 바빠본 게. ㅎ ‘


점심시간 외에 휴게시간 30분이 주어지지만 주연은 제대로 된 휴게시간을 보내지도 않고서 매장을 지키며 고객들을 응대했다. 주연은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아 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그 시간들이 그녀는 그저 즐거웠다.


마트 엽업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밤 11시까지, 주연의 근무시간은 하루 9시간 2교대로 일주에 한 번씩 세라와 교대로 돌아간다.


내일부터 주연은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근무를 하게 되고 세라는 오전 근무를 하게 된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세라는 주연에게 다가왔다.


“언니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 오늘 어땠어요? “


“재밌었어요 ^^ 세라 씨도 고생 많았어요 내일부터 오전 근무죠? 전 오후근무라 1시 출근하는데, 그때 봐요 ^^”


“네 언니 ^^ 조심히 들어가세요~ “


주연은 세라와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고 매장을 다시 둘러보았다. 저녁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임에도 아직 매장에는 손님들의 인산인해로 퇴근하기가 살짝 눈치 보였다.


‘아휴.. 아직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매장을 비워놓고 퇴근해도 될까?’


세라는 이미 퇴근을 헸고 주연은 조금만 더 매장을 지키자 생각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가족단위들, 연인들, 부부들이 카트 하나씩 밀고 다니며 그 안에 가득 실려있는 물건들을 보니 주연은 어느덧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주연은 혼자 살면서 배달음식보다는 집에서 해 먹는 요리를 선호했다. 거창하진 않아도 해 먹으면서 조금이라도 건강을 챙기며 나름 부지런히 살려고 노력했다.


‘오늘 집에 가서 뭘 해 먹나…’


주연은 오늘따라 삼겹살이 먹고 싶어 졌다. 집에서 두어줄 구워서 밥이랑 된장찌개, 묵은지만 놓고 맛있게 먹어볼 예정이다. 다른 반찬은 필요 없으니 퇴근할 때 삼겹살 한팩을 구입하기 위해 정육코너를 빼꼼 둘러보는데 그때 마침 도진과 진현, 재민 등 직원들이 저녁을 먹고 우르르 나오다 주연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엇? 사우님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


재민은 놀란 듯 주연을 보며 얘기했다.


“아.. 아직 고객님들이 많은 것 같아서요.. 매장에 조금만 더 있다가 퇴근하려고요;;”


그때 진현은 재민이 뒤에서더니 반갑게 말을 걸어온다.


“오~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괜찮으니 어서 퇴근해 보세요~ 도진선배! 뭐해요 어서 퇴근하라고 하세요~! “


주연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도진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도진은 아무 표정 없이 그저 주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가 입을 열었다.



“매장엔 저희들이 있으니 걱정 말고 퇴근해 보세요. 첫날이라 꽤 고단 하실 텐데. “


“아.. 네… 그럼 저 퇴근해 볼게요 주임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도진은 짧게 인사를 건넨 뒤 그 무리들과 함께 사라졌다.



‘후.. 왜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긴장이 되냐..’


주연은 후방 버퍼존을 지나 여자 휴게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매장으로 나와 눈여겨봤던 삼겹살 한팩을 들고 무빙워크를 타고서 1층 계산대로 향했다. 아직도 사람들은 밀려내려오고 있었고 셀프계산대부터 일반 계산대까지 계산을 하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아이고… 이거 계산하려면 한참 서있어야겠다… ‘



주연은 그나마 짧아 보이던 줄에 서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고객만족센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오픈 이벤트로 영수증 지참 시 장바구니 증정을 하고 있었다. 그곳도 줄이 꽤 길었고 직원들은 하나같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 주연의 계산차례가 돌아왔고 덜렁 고기 한팩을 들고 있었던 지라 계산은 금세 끝났다. 매장문을 나서니 찬바람이 횡하게 불어 주연의 볼이며 머리칼에 닿았다.



“아~ 시원하다! 하루가 이렇게 끝났구나! 잘했어! 정주연! 잘 마쳤어 아주! “


주연은 스스로를 기특해했다. 32살에 새로운 일, 그것도 마트 와인매니저로 안 해본 일을 한 자기 스스로가 무척 대견해서 셀프 토닥을 거침없이 해주었다.


“자 이제 집에 가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푹 자자!! “


주연의 발걸음 고단한 몸과는 달리 굉장히 가볍고 힘찼다. 걸음 속도는 출근할 때보다 더 빨랐으며 집으로 향하는 그 길이 너무나도 신이 났다. 하루를 보람차게 잘 보내었고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며 사람 사는 냄새도 실컷 맡았으니 주연은 다시금 힘차게 살아볼 용기를 낸다.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걸 하기 위해 산다. 그 기본적인걸 하는 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잘 먹고 잘 자기 위한 것. 잘 먹어야 한다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건강해야 하고 해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을 가지고 돈을 벌어야 좋은 음식을 먹는다. 잘 자는 건 내 몸하나 늬울 따뜻하고 안락한 공간을 위해서는 역시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주연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기본만 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살기로 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 주연의 모토는 ‘돈 많이 벌기’에서 어느새 ‘잘 먹고 잘 자는 것'으로 바뀌었다. 책을 통한 생각의 전환은 그렇게 주연에게 깊고 큰 지혜를 주었다.



-이도진-



도진은 가공팀과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서 나와 4층 흡연실로 향하던 중 정육코너 앞에서 주연을 만났다. 주연은 꽤 책임감이 강한 여자였다. 고객들이 많다는 이유로 매장에 좀 더 상주하겠다는 그 말이 도진에게는 고맙기도 하면서 반가운 말이었다.



“형! 와인직원분 좀 괜찮은 거 같아 그렇지?”


재민이 캔커피 한 모금 하더니 냉큼 주연의 이야기를 꺼낸다.


“사람은 더 겪어봐야 해~ “


곁에서 담배를 피우던 가공파트장 민수도 한마디 했다.


“근데 내 느낌에도 꽤 괜찮은 직원이 들어온 거 같아요 도진주임. 책임감도 강한 거 같고.. 음.. 그리고 이쁘고 ^^ “


재민과 민수 그리고 진현과 준희는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도진만 빼고.


마트는 괜찮은 여직원들이 들어오면 말들이 많다. 특히나 남자 직원이 많고, 또 미혼자들이 많은 곳이기에 괜찮은 여직원들이 들어오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잘해보라고 이어주기도 하고 본인들이 알아서 대시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사내커플에서 결혼까지 골인한 부부들이 꽤 많기 때문에.


이번 타깃은 아무래도 도진과 주연인 것 같다. 둘을 놓고 보았을 때 비주얼도 나쁘지 않고 꽤 잘 어울렸다. 하지만 도진은 그런 말들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늘 낮에 점장이 말한 그 말들 때문에 온종일 머리가 아팠다. 신경 쓰지 않는 듯하면서도 도진은 은근히 선화의 발령이 신경이 쓰였다.



“아. 도진주임. 아까 점장님한테 전해 들었는데 선화대리 발령… 괜찮겠어요?”


민수와 도진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도진이 회사에 입사하면서 두 사람은 친해졌고 동창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서로 말을 쉽게 놓는다거나, 민수가 상급자라고 도진에게 함부로 대하는 일은 단 한순간도 없었고 도진 또한 민수에게 선배대우를 깍듯하게 했다.



“ 네. 괜찮습니다. 어쩌겠어요 제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


도진과 민수의 이야기를 듣던 진현과 재민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뭐야.. 뭐야? 선화선배 여기로 발령 났어요!? 우리 점포로 온데요?! “


재민이 호들갑을 떨면서 말을 했다.


“파트장님 선화대리 발령.. 사실이에요? “


진현은 민수에게 재차 물어보았다.


“어. 다음 달 초에 발령지 뜰 거라는데, 늦어도 다음 달, 빠르면 이번 달.. 말이라는 소리가 있어.”


진현과 민수 준희는 뜨악하는 표정으로 도진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도진은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선화선배가 가공으로 올 확률은 적지 않을까요? 생활이나 지원? 아님 모바일 쪽으로 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준희가 한마디 거들었다.


“글쎄. 점장님 마음이겠지. 하지만 우리 쪽도 인원이 부족한 건 사실이라.. “


그때 도진이 드디어 입을 떼었다.


“가공으로 와도 상관없어요.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다 지난 일이니. “


도진의 말에 다들 입을 꾹 닫고 그저 도진의 표정만 살폈다. 민수는 아무런 말 없이 도진의 눈을 바라보았고 그 눈이 대답이라도 하는 듯 민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피웠다.


“다들 최선화랑 나를 더 이상 엮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미 다 지난 일이니 그 애도 나도 더 이상 엮이는 건 서로 불편하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최선화 이야기는 여기 까지만 해. “


도진은 진심이었다. 더 이상 선화랑 엮이는 게 불편하고 싫었다. 이미 지난 일에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게 싫었고 도진은 선화를 다시 본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일 하는데 서로 껄끄러울 뿐. 단지 그뿐이었다.



매장으로 복귀해 다들 폐점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밤 11시가 가까워지면서 고객들도 많이 빠진 터라 보충진열만 조금 한 뒤에 도진은 유통기한이 짧은 과채음료 및 막걸리를 확인하러 주류매장을 향했다. 도진은 와인매장 앞에서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와인 오크통 진열대에 손글씨로 쓰인 조그만 블랙보드가 눈에 띄었기 때문에.



‘오픈이벤트! 와인 구매 시 오프너 및 스토퍼 증정! ^^ 글로벌와인 5만 원 이상 구매 시 와인잔을 선물로 드립니다!! ‘


주연이다.


도진은 블랙보드를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조심히 내려놓았다. 정갈하고 바른 손글씨가 그녀의 성격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듯했다. 도진은 오늘 주연에게 여러 차례 놀랐다. 생각보다 싹싹했고 고객들 응대에도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고 작은 일에도 나서서 하려는 모습, 매장정리정돈, 창고정리까지 오늘 하루 지켜본 주연은 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는 직원이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유통업 처음이라더니..”


도진은 흡족한 얼굴로 돌아섰다. 주연의 첫인상의 강렬함은 온데간데없이 따스함만 잔잔히 남아있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와인매장은 크게 신경 쓸 거 없어도 되겠다 생각한 채 도진은 내일을 위해 퇴근 준비를 서둘러했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