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배 여중 단체전 결승전 경기가 5시간을 넘기고 있다.
전체 스코어 3대 3의 마지막 경기, 결승전까지 몸만 풀던 고진순이 드디어 첫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상대는 대구상서여중의 에이스로 고진순보다 실력이 월등했지만 고진순은 한 점 한 점 이길 때마다 파이팅이 넘치며 상대를 기선제압하여 첫 세트를 이겨버렸다. 관중석에서 응원하던 우리는 기절할 듯이 소리 지르며 한 세트만 더더 하면 목이 터져라 응원을 보냈다.
드디어 2세트가 시작했다. 파이팅 넘치던 고진순이 리시브로 시작하는 2세트에서 리시브 범실을 연달아 했다. 대구실내체육관 관중석에는 전교생이 다 온 것처럼 어마한 상서여중 학생 응원단이 북을 치며 고진순의 정신을 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사실 고진순은 새가슴이라 연습에서는 이진이보다 월등히 잘하는데 시합만 나가면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흔들림이 심해서 코치가 웬만하면 단체전 엔트리에 넣지도 않는데, 고진순 아버님이 대구에서 경기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청송에서 새벽차를 타고 경기를 보러 오신 터라 크게 인심 쓰는 척 단체전 명단에 넣은 것이다. 사실 코치는 고진순까지도 안 가고 우승할 것으로 자만하고 있었다. 양심이 있다면 지더라도 진순이 아버지에게 몰래 받은 산삼을 다시 돌려줘야 할 것이다.
다름 팀 경기는 이미 끝이 난 넓은 경기장은 썰렁했고, 마지막 경기에 자연스레 이목이 집중되었다. 관중석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는 우리는 고진순을 누구보다 잘 아는지라,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망했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역시나 고진순의 파이팅 목소리가 점점 더 떨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상대도 긴장해서 실수가 잦았고, 결승전 답지 않은 플레이가 펼쳐졌다. 그렇게 실수가 조금 더 많았던 고진순이 2세트를 내주었고, 마지막 세트는 상대팀 에이스의 전공인 화려한 스카이 서브에 이은 공격 한방이 살아나면서 경기는 가볍게 끝이 나 버렸다.
고진순은 경기가 끝이 났는데도 손에 든 타월이 심하게 떨리는 게 보일 정도로 긴장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성질이 지랄 맞은 코치는 경기장 구석진 곳으로 선수들을 집합시켰다. 달달 떨고 있는 고진순은 내버려 두고, 갑자기 이지수의 따귀를 힘껏 갈겼다. 준비 없이 갑작스레 맞은 이지수의 큰 눈이 놀랐다.
이지수는 실력이 비등한 상대에게 졌다. 이길 수도 있었지만 충분히 질 수도 있는 경기였다. 반면 이진이는 져서는 안 되는 상대에게 졌다. 개인전에서는 가볍게 이겨 결승까지 올라가게 도와준 상대에게 진 이진이가 따귀를 맞아도 맞아야 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코치의 돌발 폭행이었다. 이지수는 그 뒤로도 몇 대의 따귀를 더 맞았다. 뻘겋게 달아오른 이지수의 여린 볼 위로 소리 없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른들은 우리가 일등을 하면 다음에는 더 분발하라며 고기를 던지고, 이등을 하면 가차 없이 학대의 대상이 되어 채찍을 가한다. 우리는 친구들보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밤늦게까지 운동만 하는데 왜 우리를 학대하는지, 왜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지, 왜 우리는 매번 경기가 끝나면 당근과 채찍 중 하나를 당하는지,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따귀를 날리냐고.
이진이는 어떤 말로도 표현이 어려운 서러움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코치의 습관적인 손지검에 눈을 치켜뜨고 맞짱 뜨다가 결국 맞았다. 그 와중에도 감독수녀님이 없는지 확인하고 때리는 비열한 새끼였다.
코치는 이지수가 때리기 만만한가 보다. 김소희는 늘 소희아빠가 떡하니 지키고 있어 함부로 손지검을 못한다. 애경이와 지산이는 때릴 구석이 없어서인지, 때릴 생각도 안 하는 것 같다. 이진이는 반항심이 보통이 아니라 코치가 이지수만큼 막 대하지는 않았다.
보기에는 한 성깔 하게 생긴 이지수는 그 뒤로 완전히 기가 꺾여버렸다. 한두 번 코치한테 당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지수가 꽁꽁 숨겨두고 말하지도 않던 엄마라는 분이 나타났다. 왜 숨겨놨는지 알 것 같은 가난이 외모에 박혀 있었다. 지수엄마는 몹시 흥분해 있었고 코치를 고래고래 찾았다. 그리고는
" 당신이 뭔데 내 귀한 새끼 함부로 대하는교? 이게 뭐라고 탁구가 뭐 그리 중하다고 내 새끼를 이케 잡는교? 그라믄 못 쓰는 기라요. 내는 더는 안 시킬라니까 우리 귀한 자슥한테 그만 손지검하소. 당신 눈에는 우째 보이는지 몰라도 내는 아까워서 보기도 아까운 새끼요. 사람이 그라는거 아니오. 사람이라면 이리도 여린 애한테... 흑흑흑... 가자 지수야. 엄마캉 가자...집에. "
그 길로 이지수는 전국에서 개인전 입상까지 한 아까운 탁구를 한방에 때려치웠다. 이름까지 자신의 인생에서 '0'순위가 되어라며 이영순으로 엄마가 큰돈까지 써가며 개명을 시켜버렸다.
이진이 엄마는 학교에 올 때마다 어디서 없다는 돈이 생겼는지, 뽀쪽 구두에, 머리도 뽀글하게 꽃단장하고 나타나 코치의 코평수 넓혀지는 환대를 받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이진이의 여린 속이 어떤지는 관심도 없는데, 이지수 엄마는 아비 다른 새끼들까지 데리고 시집와서 눈칫밥 먹으며 온갖 생활고를 겪는 중에도 넘쳐나는 자식 중 하나가 뭐 중하다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진이는 만만해서 잘도 골려먹었던 이지수에게 크게 한방 당한 기분이었다.
이지수 한 명 빠졌다고, 한 경기 졌다고, 명문 팀에는 아무런 티도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규과목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운동만 하다가 뒤늦게 일반학생들 사이에 끼어 공부를 하려니, 고래 머리 이영순만 죽을 맛일 것이다.
후배 중 농구선수처럼 키가 큰 괴력의 왼손잡이 후배 김미교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포핸드와 백핸드 드라이브의 파워가 어마무시한 게 빌빌한 선배들은 잡아 먹히고 있었고, 우리끼리의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팀 내 엔트리에 선발되어 전국대회 나가는 것이 전국대회에서 성적 내는 것만큼이나 경쟁이 치열했다.
박애경을 주측으로 전국 대회 최다 우승을 한 팀으로 한일 청소년 스포츠 탁구 대표팀으로 성신여고가 발탁되어 박애경과 이진이는 생에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일본 가나자와를 갔다. 그 후 스포츠서울 신문사에서 뽑은 최우수 남녀 고교 최고팀에 남자는 서울 휘문고의 농구부와, 여자는 성신여고 탁구부가 선정되어 신문사에 직접 가서 상도 받고 서울남산타워 구경도 했다.
이건 선수들의 절대적인 실력과 우수한 선수들끼리의 경쟁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였다. 찌질한 코치의 코칭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다. 코치가 단체전 오더를 잘 짜는 것은 인정한다. 상대 코치가 어떤 식으로 선수를 배치할지를 짱구를 굴려 애경이가 까다로워하는 상대나 이진이의 급한 성격을 긁어대는 상대는 피하게 잘도 짰다. 그것 외에 기술적인 면은 코치의 실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감독수녀님은 나쁘다고 감히 평할 수 없다. 걱정으로 인한 잔소리가 기도문처럼 늘 길었지만, 속상하면 퍼질러 앉아 긴 수녀복 치맛단을 잡고 콧물을 훔치면서 너희 때문에 속 상하다고 진심을 표현할 줄도 아는 분이라 미워도 미워할 수만은 없는 분이다. 그리고 배구선수 출신답게 코치의 부족한 기술을 눈치채고 수시로 능력 있는 젊은 대학생선수들을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연습파트너로 전국각지에서 불러 모으셨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장기간 연습을 하러 오는 국립대학팀도 있었다. 일본 대학선수들과 함께 한 시간이 이진이의 진로를 일본으로 남몰래 결정하게 만들었다.
우수한 실력의 선수들이 모여, 24시간을 6년 동안 서로 경쟁하며 파트너로 연습하다 보면 전국 탑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탁구는 공이 작고 가벼워 연습량만큼이나 상대 공의 구질을 연습하는 것도 중요해서 파트너가 중요한 스포츠이다.
이진이와 김미교는 고교 주니어대표에 발탁되었다.
러시아에서 열리는 세계주니어 선수권 대회를 대비하여 소집된 기흥훈련원에서 중국에서 귀화한 세계적인 선수가 주니어 코치로 온다는 소식을 인터뷰하러 온 방송국 기자에게서 듣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열심히 가르침을 받아 한중 스포츠 외교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기자가 가르쳐준 대로 이진이는 인터뷰를 했지만, 그 유명한 여자코치는 훈련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진이를 방송까지 나오게 해 준 그 여자코치의 사랑은 국경을 넘어 한국을 지나 캐나다로 가 버렸다.
박애경은 여전히 탁구에 24시간을 맞추어 살았지만 국가대표 선발의 턱은 아직 넘지 못하고 있었다. 대회마다 성적은 내고 있었지만, 실업팀 선수까지 함께 치르는 국가대표 선발전은 여고 선수에게는 버거운 벽이었다. 작은 체구에 전진속공형이 한계였을까, 잦은 감기가 타고난 허약체질을 경고하는 건지, 전에 없었던 마음의 한계까지 빠졌다.
' 이런 실력으로 같은 전진속공형으로 현재 실업팀을 장악하고 있는 세계적인 선수와 동등한 경기를 펼칠 수나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실업팀에서 나의 한계를 파악하고 오퍼를 하지 않으면 어쩌지? 난 여기까지인가? '
애경은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어릴 적 학교 정문 옆 으리으리하게 무서웠던 느티나무 안에 갇혀 사방이 막아버린 것 같다. 깊은 뿌리까지 땅을 뚫고 올라오고, 햇살도 못 기어들어오게 느티나무 잎이 겹겹이 막아버린 것 같다.
지금쯤이면 난 해냈어야 하는데...
얼마나 더 뛰어야 하나...
얼마나 더 경쟁해서 이겨야 하나...
힘든데...
애경은 그때 1학년 3반 작은 아이로 돌아가 어두운 체육관, 불도 켜지 못한 채 탁구대 밑에 움츠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빨아 땡길 것 같은 으스스함이 소름 끼친다.
그 모습을 이진이가 숨어서 지켜본다. 저 바보 청개구리가 얼마나 멀리 한방에 높이 뛰려고 저렇게 움츠리고 있는지, 너무 애처로워 한 대 세게 때리고 싶을 정도다.
이진이는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체육관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