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실업팀에 입단하다.

같은 팀 다른 선택

by 길이



박애경은 실업팀과 계약을 끝냈다.

다른 팀은 고려하지 않았다. 최고의 실업팀으로 가서 용 꼬리로 시작하는 것보다, 애경이를 원하는 팀에서 뱀 대가리로 우뚝 설 것이다. 계약금이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그건 부모님께 드리는 애경의 선물이다.

아빠... 아빠는 늘 애경이 편이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 아빠가 있어 다행이다. 아빠를 생각하면 따뜻해지고 힘이 난다. 그리고 그 무한한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 실업팀을 일찍 결정한 이유에는 아빠도 있다. 빨리 실업팀에 적응해서 국제대회에 나가 아빠께 큰 산물을 안겨드릴 것이다.

그 아빠는 제대로 뒷바라지 못해준것을 미안해하며 온 마음으로 딸을 사랑한다.


이진이는 학교에 전지훈련 온 일본 국립대학교 탁구부 주변을 얼쩡거리느라 바쁘다.

이번이 두 번째 훈련인데도 일본 선수들은 이진이의 변화가 심한 수비수 공을 잘 넘기지 못한다. 매번 하는 친선 게임에서도 이진이가 이기고 있다. 하지만 이진이에게 그들의 탁구 실력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아는 일본어를 총동원해서 분위기를 살핀다. 이미 한국인감독과는 장학생에, 기숙사 무료 제공에, 월 생활비 한국돈 사십만 원까지, 구두로 둘이서 은밀하게 계약을 끝낸 상태이다. 일본에서 이진이 같은 수비수는 귀했고 더군다나 주니어 국대라니 오기만 한다면 서류는 학교 측에서 비자부터 싹 다 준비한다고 했다.


‘ 내 인생이고 내가 여태까지 참고 운동을 한 목적이니, 당연히 내 미래는 이제 내가 결정한다. 두 번의 빠꾸는 없다.


이진은 이번만큼은 반드시 자신의 선택한 길로 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애경이가 계약한 팀에서 이진이에게도 끊임없이 입질이 오고 있지만, 죽어도 그 팀은 사절이다. 일본대학의 한국인감독은 이진이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몰래 줬다. 내년 봄 다시 전지훈련을 왔을 때 제대로 유학절차를 진행하자는 약속을 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틈 나는 대로 한자와 일본어 공부를 해 두라는 조언도 해 주었다.

기숙사에는 장기간 한국어와 탁구를 배운다고 같이 합숙을 하고 있는 일본인 대학생 마찌꼬가 있었다. 마찌꼬는 이진이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엉망진창 섞인 외래어 주고받기를 재밌어했다. 가끔 탁구부의 열성팬인 일본어 선생님이 마찌꼬 사이에서 통역을 제대로 해 주시지만, 그것보다도 안 통하는 대화가 더 통하는 묘한 우리였다.


“ 지나~ 좇발 느무 맛이스무니다. ”

받침 발음이 어려운 마찌꼬가 자기 돈으로 사 온 족발을 맛나게 뜯으며 하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헉! 마찌꼬 발음이 왜 그따구야? 다메다메~ 자아~ 다시 따라 해 봐 조~옥 바알~.”


“ 무즈까시네~ 조~옻 바루~ .”


으이그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받침 발음에 ‘진아’를 ‘지나‘로 부르는 마찌꼬에게 한국에서 ’ 족발‘ 발음은 금지시켜 버렸다.


“ 마찌고상~ 목걸이 너무 이쁘다. 마찌꼬 닥상 부자데스요. 매군데 구다사이~.”


“ 지나~ 일본에서는 남자...ㅎㅎㅎ 스미마셍. 앙대앙대 무니다 목걸이 즈가우즈가우~. "


익숙하지 않은 한국의 기숙사에서 마찌꼬는 외국인답지 않게 적응도 잘하고 예의도 바른 언니였다. 그런 마찌꼬를 보면서 이진이의 일본대학 굳히기에 플러스가 된 좋은 친구였다. 낯선 이국땅이겠지만 드디어 반복적인 일상에서 탈출을 할 수 있다는 설렘에 이진이는 빨리 고3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날 연락도 없이 엄마가 찾아왔다. 여전히 화려한 화장에 1호실 방에서 조신하게 이진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체육관에서 연습 중이던 나를 코치가 숙소로 내려 보냈다. 안 본 사이 엄마는 더 이뻐진 것 같다. 엄마는 다정한 눈빛으로 이진이를 맞이했다.


“ 날이 풀려서 운동하기에 딱 좋다 그쟈? 오는 길에 경주가 온통 벚꽃으로 하얀 눈밭이 되어 있더라. 경주는 참 좋아. 집들도 기와집이고 그쟈? ”


학교 밖을 제대로 나가봐야 알지. 바깥세상은 봄이 와 벚꽃이 만개했는지 이진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여전히 이진이의 생활을 이해 못 하는 엄마가 이진이는 반가움보다는 짜증이 확 밀려왔다.


“ 갑자기 와 왔노? 뭔 일 있나? ”


“ 아니~ 기냥 와 봤다. 니도 보고 싶고 해서… 용돈은 있나? 좀 주까? ”


주섬주섬 지갑에서 이만 원 꺼내 이진이 손에 쥐어주고는 뭔가를 빼먹은 모양인지 주저하던 엄마가 가만히 눈 내리깔고 앉아있는 이진이에게 어렵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느그 오빠야가 내년이면 벌써 대학교 졸업이네. 취업은 우예야 하는고?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대모 한다고 싸돌아다니기만 해 갖고 걱정이다. 뭐 해 먹고살지… 니는 운동도 잘하니까 니 앞길 알아서 척척 갈거라 걱정이 없는데, 니 오래비는 우야면 좋노? ”


“ 오빠야가 와? 알아서 하겠지 뭐, 국어 샘 하던지, 방송국 기자 하던지, 오빠야가 하고 싶다는 거 하면 되잖아. ”


“ 그케 공부해 갖고 어딜 드가노? 그란데는 아무나 드가나? 그래서 말인데, 니 이번에 애경이 드가는 회사에서 니도 오라고 그란다던데, 니는 어떻노? ”


“ 내는 대학교 간다고 안 캤나. 나는 실업팀 안갈끼다. 내는 내가 알아서 살 거니까, 돈 달라는 소리도 안할테니까, 실업팀 가라는 소리 하지도 마라. 이번에는 절대로 안 간다. “


나는 실업팀으로 가서 또다시 밥만 먹고 탁구만 하고 싶은 마음도 없거니와 그 팀의 감독도 싫었다. 이미 중3 때부터 수비수 연습 파트너로 수시로 그 팀에 불려 다녀 그 팀의 분위기를 익히 알고 있었다. 이진이는 그런 강압적인 감독은 절대 사절이다. 지금 코치도 싫지만 그 감독이 백배는 더 싫다. 그런데 지금 엄마가 그 팀을 떠 보다니, 이진이는 어릴 때 강제로 중학교를 보냈던 그때가 떠올라 미칠 듯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 알지. 그케야지. 그냥 함 얘기해 봤다. 그 회사에서 느그 오빠도 입사시켜준다고 카네. 어디 지방대학교 나와갖고 거기를 드가기가 쉽나? 내 그냥 함 물어봤다. 참! 그라고 우리 집 이사 갈끼다. 이번에 다리 건너에 주공아파트 생기는데 영희네 아저씨가 보증 서 줘서 돈 쪼매만 내고도 아파트에 드갈 수 있다카네. 돈은 없어도 이런 기회가 또 있겠나 싶어서 계약했다. 잘했재? 올 겨울방학에는 그 아파트로 니도 오면 된다. ”


오빠의 취업, 이사 가는 새 아파트… 왠지 둘 다 이진이는 반갑지 않다. 기분이 싸하다. 설마 양심이 있다면 계모가 아니라면 설마... 그러진 않겠지.

이렇다 할 대꾸도 없이 한 손에 쥐어진 이만 원을 꾸욱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딸에게 엄마는 밥 잘 먹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가 버렸다. 이번에는 나만 생각할 것이다. 이진이는 다시 다짐했다.


코치가 이진이를 따로 부른다. 고2가 되었으면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고. 고3 되어서 해도 되는 결정을 어른들은 왜 이리 난리인지 모르겠다.

코치는 중간에서 오퍼가 오는 실업팀을 이진이에게 알리지도 않고 전부 내치고 있다는 것을 저번 시합 때 다른 실업팀 코치에게 들었다. 애경이가 결정한 실업팀으로 이진이까지 보내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무슨 뒷돈을 얼마나 받아먹은 건지, 이진이의 약점인 동정심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학생 이진이 알기에는 너무 은밀하고 더러운 뒷거래를 알 수가 없었다.


“ 운동이라는 게 자기 혼자만 잘 살라고, 가고 싶은데로 정하면 안 되는 거야. 같이 고생한 동료들의 미래도 같이 걱정해 줘야지 진정한 동료지. 너 혼자 연습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 애경이처럼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현명하게 선택을 해야 해. 니 남은 동료들은 아직 정해진 팀이 없는데 같은 팀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잖아. 그리고 니 엄마도 오빠 때문에 걱정이 많으신 것 같은데, 혼자 너희 둘 키운다고 얼마나 힘드셨겠니. 이진이만 결정하면 친구들도 좋고 너희 집도 좋고 다 좋을 것 같은데… 그치? 넌 의리가 있잖아 잘 생각해 봐. “


듣기도 싫은 엄마 혼자 키워진 새끼는 아비 없이 크고 싶었겠냐고. 이진이 심경에 혼란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은 건드렸다. 야비한 코치새끼가 이미 대학을 결정한 마음에 지 욕심만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혼란에 빠트렸다.

애경이만큼만 심지가 굳었으면, 너만 생각하라며 응원해 주는 아빠가 이진이도 있었으면.

반항심만 가득하고 자존감 제로인 이진이는 ' 너 하나만 희생하면 된다'라는 말에 오랜 시간 동안 품어왔던 대학을 쉽게 아주 쉽게 또 포기했다.

따스한 오월, 고2 한참 웃을 꽃다운 나이에 실업팀에서 촉탁 사번을 부여받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족쇄였다. 태어난 환경도, 탁구라는 것도 잘하면 잘할수록 먹잇감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후회하더라도 같이 지내 온 친구들과 하나뿐인 오빠를 위한다는 건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엄마... 밉지만 늘 그리운 엄마이다.

그런데 세상이 또 이진이를 비웃기라도 한 듯 졸업도 하기 전에 실업팀으로 끌려갔고, 오빠는 그 어렵다는 공무원 시험을 단번에 합격해 해 버렸다. 내 사랑하는 친구들은 이진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대학을 특기생으로 입학을 확정 짓고 이쁘게 여고생처럼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실업팀에 입단한 박애경은 본격적인 날갯짓을 준비했다.

탄탄한 기본기와 흔들림 없는 맨탈 그리고 빠른 두뇌회전은 그 팀의 뱀 대가리 일짱으로 직행했다.

이진이가 정확히 어떤 플레이인줄은 제대로 파악도 안 한 감독은 뒷면 러버를 이질러버로 바꾸어 변화를 줘야 한다며 코치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러시아로 훈련을 보내서 국제적인 수비 스타일을 배울 필요가 있다며 3개월 정도 곧 보낼 거라고 준비하라는 둥 요란을 떨어댔다. 이 모든 것들은 이진이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고 일방적이었다.


박애경과 이진이는 또 같은 곳으로 가게 되었지만 둘은 달랐다.

애경이는 자신이 선택했고, 이진이는 또 타의에 의한 결정이었다. 무엇이 둘의 문제이고 차이일까, 애경이는 운동선수에게 중요한 냉정한 판단력과 뜨거운 열정과 자존감이 높다. 반면 이진이는 쉽게 달아오르고 가볍게 무너지는 게 심지가 약하다.

자신을 믿을 줄 아는 애경이와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에 결정적 선택에서 움츠리는 이진이는 같은 곳으로 향하지만, 선택한 방법에서 승패가 갈라져 버렸다.




keyword
금,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