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여중고는 경주시내의 중심에 위치했다. 학교 바로 옆에 성동시장이 있고, 그 건너편에 경주역이 있다. 학교는 영춘초등학교에 비해 작았다. 'ㄱ'자 모양으로 두동으로 나뉘어져, 한 동은 중학교 건물로 강당까지 합쳐 5층이었고, 각학년은 3반까지만 있었다. 고등학교 건물도 쌍둥이처럼 같은 형태였지만 강당은 한 곳만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학교 안에는 성당과 수녀원 그리고 작은 수녀원이라고 불리는 탁구부의 기숙가 있다. 학교는 아담했고, 무시무시한 느티나무는 없었다. 학교 정문 옆 성당과 기숙사 사이에는 등나무로 덮혀진 벤치가 있다. 그곳은 학생들의 쉼터이자, 주말이면 성당 신자들의 모임터였다.
성신여중으로 입학을 한 탁구부 동기는 6명이었다.
박애경 이진이 김소희 이지수 청송 진보에서 온 고진순, 진순이는 아버지가 또 딸이라고 성질나서 진보에서 태어났다고 그냥 진순이로 지었다고 했다. 그 후 임신을 한 엄마가 쫓겨난 외가에서 또 딸을 낳았다고 외순이로 지었다고 했다. 진순이는 아빠 심정도 이해가 간단다. 그 뒤로도 줄줄이 딸만 낳았고 드디어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 호적을 정리해 보니 뒷장까지 넘어갔다며, 1남 8녀라고 했다. 이진이는 문득 영춘국교 복도에 붙여진 표어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떠올랐다.
옆에서는 포항에서 온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쓴 자그마한 강지산이 전래동화 듣듯이 진순이 호적스토리에 훅 빠져있었다. 박애경처럼 웃을 때마다 양쪽 볼에 보조개가 쏘옥 들어가는 게 뽀얀 피부와 잘 어울렸다. 잘 먹고 곱게 자랐는지 청송 두메산골의 날다람쥐를 닮은 진순이와는 때깔부터 달랐다. 지산이는 알고 보니 어마한 집안의 후손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 출신 박영관 선생이었다. 지산이의 외할아버지는 전남 고창과 장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이후 수백 명을 동원하여 태극기 휘날리며 만세 운동을 선동하셨고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게 했다고 한다. 그뿐인가 경기도도 아닌 경상도도 아닌 전라도에서 상해임시정부까지 군자금을 보내셨고 또 모금해서 보내시려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에 반신불구가 되셨다니...
어쩐지 독립운동가 후손답게 동그란 안경이 어울리는 게 우리와는 태생부터 때깔이 달랐다.
박애경은 10시 지침 전까지 개인연습을 할 수 있는 체육관이 기숙사 바로 있다는 것에 몹시 만족했다. 이진이는 상상했던 것보다 기숙사는 작았고 빈약함에 실망스러웠다. 물론 엄마의 집보다는 나았지만 말이다.
기숙사에는 방이 총 4개였다. 교실을 개조한 제일 큰 방은 한겨울에는 냉골이었다. 주로 식사를 하는 공간으로 티브이도 있었다. 굳이 공부를 하고 싶다면 밥상을 펼치고 할 수 있다고 선배가 알려줬다. 나머지 세 개의 방에는 각자의 개인사물함이 있는 곳으로 생활관이었다. 제일 큰 방 1호실에 박애경, 이진이, 강지산이 같이 배정되었다. 중고등 선수들을 합치면 30명이 넘는데 고작 3개의 방에 나누어서 잔다는 게 싫었지만 다행히 셋이 나란히 누워 잘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어색하고 낯선 공간을 달래주었다.
탁구부원들의 출생 지역은 다양했다. 경주가 고향인 선수는 김소희와 이지수뿐이라 애들은 집에서 다니기로 했다. 선배들 중에는 고참 자매가 있었다. 자매는 볼 때마다 부지런을 떨며 빨래를 하고 있거나, 늘 뭔가를 분주하게 하고 있었다. 일본사람 같기도 한 요상한 언어를 구사하는 자매는 제주도에서 왔다고 했다. 졸업 후 한 명은 요상하게 수녀님이 되었고 한 명은 제주도 엄청난 부잣집에 시집을 가며 탁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른이 되었다. 그 외 선배들은 대부분 경상북도 각지에서 왔다. 김천에서 온 선배들은 ‘니들‘이라는 호칭을 썼다. 경상도 대부분 지역은 ‘느그들’이라는 호칭을 쓰는데 김천은 충청도와 경계가 애매해서 그런지 말투가 약간 늘어지는 게 듣고 있자면 놀리는 말투 같기도 하고 그렇다. 나머지는 대구, 왜관 경산, 포항, 안강으로 싸우자는 투의 투박한 사투리가 비슷했다.
이진이의 집까지 와서 스카우트 제의했던 수녀님이 보이지 않는다. 멋있게 생긴 서울코치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아주 키가 큰 수녀님이 감독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자신은 김아나다시아 수녀이며, 예전에 배구선수를 했었고, 현재는 학교에서 행정 담당 및 탁구부 신임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김수녀님은 정말 컸다. 손바닥도 커서 박애경과 강지산 머리통을 양손으로 너끈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수녀님은 저녁 9시가 되면 기숙사 밖에서 문을 잠근다. 다른 탈출구인 일층 과학실로 이어지는 복도도 철제문으로 잠겨진다.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해 잠그는 것이라는데, 학교 정문은 저녁미사가 끝나면 굳게 잠기고, 도둑놈이 들어와도 성모마리아께서 떡하니 양팔 벌리고 지키고 계시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다니, 애경이는 씩씩대며 집에 가겠다고 발작증세를 보이는 이진이를 강당까지 끌고 가 말린다고 혼쭐이 났다. 이진이는 왜 작은 수녀원인지 알겠다며 이건 자유권 박탈이라고 팔짝 뛰었다. 지방대 국문과에 간신히 입학한 오빠가 민주주의에 대해 이진이를 앉혀놓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을 때 나랑 나이가 비슷한 가난한 아이들을 미싱 공장에서 하루 16시간 이상 강제노동을 시키며 임금체불에 강제구금까지 한 것은 자유권 박탈이며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박해라고 연설했었다. 이진이는 오빠의 말을 그대로 읊으며 미싱 돌리는 애들이랑 뭐가 다르냐며 애경이에게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나는 여기 온다고 한적 없고, 어른들끼리 짜고 한 짓이니, 다시 집으로 가야겠다며, 도와줄 수도 없는 애경이에게 난리를 쳤다. 넓은 강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악을 써대며 흥분하는 이진이를 애경이는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가 그냥 와락 안아버렸다. 그리고 같이 울었다. 하루 종일 미싱만 돌려야 하는 애들과 지금 우리가 이 낯선 학교에서 24시간 갇혀 지내야 한다는 게 뭐가 다르냐며, 이진이는 안겨서도 했던 말을 또 횡설수설하며 애경이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징징댔다. 애경이도 이진이 말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 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 타지까지 와서 탁구라는 기술을 익히러 왔다. 그건 스스로 앞날을 책임져야 하는 우리의 지금이 미싱시다와 다른 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애경이는 이진이를 잘 달래서 같이 졸업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진이가 가난한 동네로 다시 돌아가는 게 애경이는 싫었다.
독재정권과 더불어 부자만 더 배불러가는 세상에서, 가난의 그늘에 가리어져 피지도 못하는 꽃들이 많지만, 애경이는 이진이와 함께 스스로의 힘으로 양지로 나갈 것이다
" 내 안다. 니 와카는지. 니는 자유로운 아이인데 싫다는 탁구를 또 해야 하고, 거기다가 갇힌 기숙사에 무서운 선배들까지, 근데 우짜겠노 니가 지금 제일 잘하는 게 탁구아이가? 진이야 우리 같이 성공하자. 어른되면 보란 듯이 자유롭게 살자. 쫌만 참고 견디자. 내가 옆에서 항상 같이 있을게. 니 지금 영천 돌아가봤자 뻔하다 아이가. 조금만 참고 같이 함 해보자. 그래도 안되겠으면 그때 고마한다고 하면 내 안 말릴게 약속한다. 자~ 손가락 걸자. “
언제 강당에 왔는지 강지산이 옆에서 자유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며, 독립운동가 후손답게 뼈를 깎는 투쟁이 필요하다고 알려줬고, 애경이는 어느 정도 진정한 이진이에게 다시는 또 미쳐날뛰지 못하도록 어른스럽게 미래계획도 알려줬다.
“ 진이야 , 니 엄마가 니 대학 보내줄 것 같나? 절대루 안 보내준다. 근데 지금 니 탁구는 잘하잖아. 그래서 이 학교까지 왔는 기고. 이대로만 하면 대학은 쉽게 간다아이가. 대학교 가면 특별장학생으로 장학금도 받고, 전공도 니가 하고 싶은 그림 배우는 과로 가면 된다 아이가. 나는 실업팀 가서 국가대표하면 되는 기고. 우리 쪼매만 참자. 부모님은 우리 못 도와준다. 탁구가 우리 미래를 도와야 한다. 니 엄마한테 간다고 나은 거 하나도 없다. 내캉 여기서 잘 지내자. 그라재. 알았나?
애경이 저 지지배 속에는 진짜 노친네가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박애경은 이진이의 똘기가 다행히 며칠을 못 넘기고 다시 잘 웃는 얼굴로 돌아오자, 훈련에 집중했다. 연습 시간 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훌륭한 연습장이 항시 열려있다는 것은 애경이의 하루일과를 빼곡하게 채워줬다. 거기다가 로봇 연습기계라는 것도 있어 혼자 연습도 할 수 있었다. 로봇이 던지는 공이 홍코치가 던지는 공처럼 구질이 까다롭지 않고 단조롭지만 그래도 단순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연습을 할 때는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오목대 고무의 특성상 서브의 회전력이 약한데, 빠른 템포의 서브로 코스를 찌르는 연습도 공이 많으니 집중하고 할 수 있어 좋다.
이미 주니어 국가대표에 발탁된 선배도 몇 명이나 있고 그 외 선배들도 좋은 연습 파트너이자 라이벌이 되었다. 물론 김소희는 여전히 강력한 라이벌이다. 분발해야 한다. 시간이 많은 것이 아니다. 아빠의 왼쪽팔이 더 악화되기 전에 국가대표가 되어 고쳐드려야 한다. 엄마가 일요일마다 물건 팔러 다니지 말고, 편하게 주님만 만나러 교회에 갈 수 있도록 빨리 훌륭한 선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고 해야 할 것이 있다.
애경이는 지대범이 어디서 알아냈는지 지대순이라는 이름으로 보내준 소포에서 손편지와 정성껏 포장되어 온 절인 홍삼을 씹으며 이층 체육관으로 매일 밤 찾아갔다. 기숙사가 싫다고 난리브루스를 쳤던 이진이는 누구보다 기숙사 생활을 재미나게 하고 있다. 정말이지 자유로운 친구라 가끔 힘들게 하지만 그만큼 단순해서 애경이는 이진이가 좋다.
입학식날 교실구경 한번 한 것이 고작인데, 곱슬머리 쪼잔이 코치가 갑자기 시험을 쳐야 한다며 연습도중 교실로 급히 보냈다. 교복 입을 시간이 없어 운동복을 입은 채로 볼펜 하나 딸랑 들고 교실로 뛰어갔다. 앞자리에 이지수가 앉았다. 이미 시험지는 돌려지고 있었다. 이진이는 2번만 찍겠다는 작정을 하고 시험지를 펼쳤는데, 서술형이 은근히 많다. 거기다가 숫자도, 그림 도형 같은 것도 있는 게 대충 봐도 수학처럼 보인다. 읽기도 싫은 문제지를 보니 두통이 밀려왔다. 빈답을 내기는 좀 그래서 앞자리 이지수 꺼를 대놓고 커닝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이름도 모르는 이진이를 부르며 한소리 하셨다
“ 어이~ 니 탁구부, 아이큐 테스트 하는데 와 빼끼노? 대단하다 대단해. 골 때리는 놈이 울 반에 들왔네. ”
일주일 뒤 교무실에서 감독수녀님의 급한 호출로 연습하다 말고 뛰어갔다. 조금만 흥분해도 얼굴이 쉽게 뻘겋게 달아오르는 감독수녀님은 이미 핑크고릴라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누르며 말씀하셨다.
“이진이하고 이지수는 아이큐 점수가 똑같네. 고래보다 낮네. ”
교무실 안에 있던 선생님들이 학생들처럼 키득키득 댔다. 수녀님은 누가 봐도 화가 난 얼굴로 수도자의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수도자도 사람인지라 결국 미사시간만큼 긴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고래 둘은 그저 묵주의 주기도문을 몇 회나 주문을 받을지에 눈앞이 깜깜했다. 고래 이지수는 인도사람처럼 짙은 눈으로 이진이를 째려봤고, 사람 이진이는 고래의 시험지를 베껴 쓴 것을 후회했다. 조금만 더 훈육의 시간이 길었으면, 둘 다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다행히 쓰러지기 직전 감독수녀님은 큰 일을 빠트렸다며 화들짝 일어나 급히 체육관으로 갔다.
“ 강지산이, 강지산이 어딨노? 우리 지산이는 아이큐가 와이리 높노?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집안에 누가 또 머리 좋은 사람이 있나?
“ 언니가 머리가 좋아요. 멘사회원이래요. “
강지산은 대수롭지 않게 아이큐 높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덤덤하게 대답했고, 고래 둘은 멘사가 뭔지 서로에게 눈으로 물었다.
이진이는 애경이의 말대로 대학을 특별장학생으로 입학을 목표로 삼으니 24시간 갇힌 학교생활이 미친 듯이 싫은 정도는 아니었다. 선배들 중 나쁜 년도 있지만 좋은 선배도 많았다. 또라이 질량의 법칙’을 알려 준 혜영선배의 말대로 또라이는 어디든지 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게 답이다. 지침 시간이 한참 지난 자정 무렵 갑자기 2호실에서 애국가 부르는 소리가 1호실까지 크게 들렸다. 잠귀 밝은 애경이가 놀라 벌떡 일어나 이진이와 지산이를 깨웠다. 옆에 자던 똥똥이 혜영이 선배가 부스스하게 일어나 놀란 신입들에게 알려줬다.
“아이고~ 시끄러부라. 저 김천 선배 또 금메달 땄나 보네. 가끔 가슴에 손 얹고 잠꼬대로 애국가 부른다. 오늘 애국가만 부르는갑다. 양호하네. 신경 끄고 자라. “
며칠 뒤 깜깜한 밤 또 2회실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진이까지 화들짝 놀라서 깼다.
“ 저저 김천 선배 또 몽유병 도졌네. 자다 말고 와 자꾸 남의 얼굴에 지 얼굴을 들이미는지 모르겠다. 진짜 당해보면 식겁한다 아이가. 내도 당해봐서 안다. 비명이 절로 나온다. “
제발 졸업할 때까지 몽유병 김천 선배와 같은 방으로 배정되지 않길 기도한다.
성신여중으로 온 뒤 박애경은 탁구실력도 나날이 늘고 생활면에서도 흠잡을 게 없는 모범적인 선수였다. 이진이는 기분 내키면 열심히 했다가 힘들면 대충하는 기복에 코치한테 자주 혼이 났다. 성격은 점점 장난꾸러기 사내아이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대체로 성실한 이지수는 이목구비가 뚜렷하니 눈썹도 진한 게 인도사람처럼 까탈스러워 보이지만 은근히 헐랭이라 이진이가 놀려먹는 재미가 있는 타깃이었다.
“ 야 빨리 뛰어! 코치 나타났다. ”
5층 매점에서 몰래 과자를 사들고 내려오는 이지수를 골려 먹으려고 이진이는 없는 코치가 나타났다고 소리를 질렀다. 왕눈이 겁쟁이 이지수는 이층 체육관까지 미친 듯이 두 세 계단씩 내려오다가 그만 헛디뎌 붕~하고 날아버렸다. 헉! 이런 처참한 결과까지 바라지 않았는데, 드라큘라처럼 피를 질질 흘리며 한 손에는 옥수수콘이 꼭 쥔 채로 넘어진 이지수는 감독수녀님이 급히 데리고 깨진 앞니에 맞춰 다른 앞니도 치과에서 갈아 맞춰 가지런한 옥수수 이빨을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이진이는 핑크고릴라에게 장시간 독대를 당했다.
86 아시안게임에, 88 올림픽 준비에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덩달이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인기가 대단했다. 호돌이 인형도, 각 종목이 그려져 있는 티셔츠도 너무 비싸다. 테리우스의 여자친구를 그릴 줄 아는 이진이에게 용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감독수녀님이 매달 주는 준 용돈 이만 원을 이진이는 반 친구에게 주고 하얀색 면티 10장을 사 오라고 시켰다. 그 친구는 너무 뚱뚱해서 택시를 타면 아저씨가 기본금 오백 원에 오백 원을 더 달라고 할 정도로 보기 드문 뚱땡이인데 운동복 입은 이진이를 이성으로 착각한 건지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탁구부에 목맨 여학생들이 많다. 탁구부원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지만 가끔 이진이는 바깥세상과 연결통로로 활용하고 있다. 그림에 필요한 매직은 코치 서랍에서 검은색 빨간색 한 개씩만 며칠만 몰래 빌렸다. 기숙사 선배들에게 탁구 치는 호돌이 티셔츠를 단돈 삼천 원에 팔아 만화책을 빌려 볼 작정이다.
드디어 모은 만원으로 선배들이 주문한 비디오와 이진이가 읽을 무협만화 몇 권을 빌리러 야반탈출을 실행했다. 목적지는 학교 건너편 비디오가게이다. 고1 선배가 이진이 얼굴에 화장을 해댔다. 그리고 능숙하게 본인 얼굴도 칠했다. 둘 다 얼굴이 단풍처럼 물들었다. 과학실 철제문을 스파이더맨처럼 기어올라 비어있는 윗 공간 틈새로 통과했다. 그리고 상시 열려있는 교무실 옆 중앙 입구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비디오 아저씨는 이미 선배와 아는 사이인 듯 애마부인을 까만 봉지에 넣어주었다. 또래에 비해 키가 컸던 이진이는 고등 선배들 사이에서 난생처음 야한 비디오를 보고 냉골 바닥이 후끈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여파인지 중2가 되자마자 첫 생리를 시작하여 기숙사 동기 중 가장 먼저 성인이 되었다. 그 시기 이진이에게 사춘기가 들이닥쳐 코치에게 반항심이 극에 닿았고, 코치는 골칫덩어리 이진이만큼이나 이지수를 같이 이유 없이 혼을 냈다.
우린 탁구라는 하나의 이유로 다른 지역에서 모여 24시간을, 벚꽃이 피고 지고, 다시 피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렇게 6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감독수녀님은 탁구부 기숙사를 작은 수녀원으로 착각하신 듯 9시 문 잠그기 전까지 문지방이 닿도록 오셔서 잔소리에 걱정에 잔소리였다. 그 잔소리를 영양분 삼아 우리는 커가고 있었다. 중요한 청소년 성장기를 함께 울고 웃으며 보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리그전을 하는 날이나, 시합 출전 명단에 후배에 밀려 출전을 못하게 된 선배들의 괴롭힘에 기숙사 생활은 한동안 피곤해지지만 우린 경쟁해야 하는 운동선수들의 기숙사라 어쩔 수 없었다.
박애경은 그 시비 거는 선배들에 비해 실력이 월등해서 리그전에서 애경이가 일등을 하면 딱히 괴롭힘은 없었다. 아니면 너무 열심히 하니 차마 시비를 못 거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사춘기도 잊은 채 너무 탁구에만 빠져 있는 애경이가 못마땅해진 이진이는 뜻대로 안 되는 기타를 내팽개치고 감히 잔소리를 해댔다.
“ 애경아, 니 어디 가나? 뭐가 그리 바쁘노? 귀신이 몽둥이 들고 쫓아오나? 그러다가 니 진짜 몸 상한다. 니는 이미 일짱이고, 대회 나가도 충분히 일등한다 아이가? 저렇게 잘하는 선배들도 니 잘 못 이기잖아. 근데 뭐가 그리 안달이고, 와 그리 빨리 해내려고 니를 못살게 구는데? 니 그카다가 늙으면 분명히 골병 난다. 내 말 명심해라. ”
“ 히히 글라? 내도 잘 모르겠다. 그냥 이케 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좋다. 몸 쪼메 힘든 거는 괜찮다. 그냥 빨리 해내고 싶다. ”
몰랐다. 그때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