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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진로 결정

by 길이

" 진이야 개안타. 나는 니를 잘 안다. 라켓은 금방 적응할끼고, 경기도 즐기면서 잘 할끼다. "


" 내 때문에 일등 못하면 우야노. 걱정돼서 미치겠다. "


" 걱정 마라. 내캉 김소희캉 3점 따 놓을 테니까, 니는 이지수캉 한점만 더 따면 된다. "


전국소년체전은 이변 없이 금메달을 땄다. 박애경의 계획대로 전 경기를 김소희, 박애경이 각각 단식과 복식을 3승으로 가볍게 끝내버리고, 나머지 1승은 이지수와 이진이가 간신히 1승을 매 경기마다 어렵게 획득해서 생에 처음 금메달이라는 것을 목에 걸었다. 다행히 이진이의 오락실 사건은 금메달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만약에 다른 색깔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면, 메달은 쇠사슬이 되었을 것이다.

경주시는 경주의 선수가 주측이 되어 메달을 딴 종목들을 모아 파란색 용달차의 짐칸에 두명 씩 태워 경주역에서부터 천마총을 거쳐 마지막 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시켰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시청에서는 경주시장이 목에 걸려있는 금메달을 다시 걸어주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사진을 찍어 경주신문 일면을 장식했고, 그 봄 미제 화장품이 가득 숨겨진 엄마의 서랍장 위 벽에는 금메달이 대못과 함께 걸렸다. 여름 장마가 지나자 금메달은 서서히 빛을 발해 누렇게 변색하기 시작했다.

소년체전은 나름 화려하게 마무리 지었지만, 이진이에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엄마의 성의없는 오뎅반찬을 보고 밥그릇에 물을 부으며 이진이가 말했다.


“ 엄마, 나 탁구 관둘래. “


“ 머어? 와? 와 또 그라노? “


“ 하기 싫다. 그냥 미술학원 보내도. 옛날에 약속했잖아 일등하면 미술학원 보내준다고. “


그림을 좋아하는지, 어금니가 몇 개나 썩었는지도 관심없던 엄마가 요즘 슬슬 이진이 인생에 끼어드는 게 몹시 못마땅하다. 엄마는 이진이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선수쳐서 했던 약속이었으니, 뒤집기에는 난감할 것이다. 이진이가 일요일 아침마다 학교는 가지않고, 티비에서 방영하는 캔디를 보려고 미적대면 엄마는 그렇게 달래곤 했다.


“ 일등 한 번만 해 뿌라, 그카면 엄마가 탁구 때려치우게 해 줄끼다. 그카고 니가 보내달라는 미술학원도 보내줄게. “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제 엄마는 이진이에게 일방적으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이진이는 당당하게 엄마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역시나 이진이가 우려하던 대로 엄마는 머뭇대며 다른 괜찮은 핑계를 찾으려고 눈동자를 굴리는 게 이진이 눈에 보였다.


“ 그랬재 내가. 암 그케야지. 미술학원도 가고 그케야지. 근데 니 탁구 안 아깝나? 일등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이다. 니도 잘 알잖아. 이 촌구석에서 전국 일등이 쉽나? “


“ 싫다. 나는 탁구 재미없다. 그림 배울끼다. 미술학원 보내도. “


이럴 줄 알았다. 그래도 막상 핑계를 대기 시작하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진이는 급 서러워졌다. 물에 부은 밥을 한 숟가락 억지로 밀어 넣으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삼켰다. 어설프게 울음으로 흐지부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이번에는 힘들기만 한 탁구를 관두고 어릴 때 다녔던 미술학원 샘을 다시 찾아갈 것이다. 이진이는 불어 터진 밥을 남기고 캔디만화를 오늘도 보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곧 9시부터 훈련이 시작인데 이진이는 아직이다. 애경은 준비운동을 하면서 초조하게 벽시계만 쳐다본다. 다행히 아직 코치도 보이지 않는다. 매주 일요일마다 코치가 이진이보다 늦게 들어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지겹다. 역시나 이진이는 아슬하게 세이브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옆으로 스윽 와서 준비운동을 하는 이진이를 밉지 않게 흘겨보지만, 이진이는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해맑게 웃는다.


애경은 중학교 진학을 전국소년체전을 하면서 경주 성신여자중학교로 결정해 버렸다. 탁구의 명문학교로 진학할 것이다. 탁구부만을 위한 기숙사가 있어 마음껏 개인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게 몹시 마음에 들었다. 애경은 탁구에 대한 미래가 분명하다. 반드시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 나갈 것이라고 이진이에게 말했고, 엄마의 정신적 지주인 목사님에게도 약속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진이도 같은 학교로 진학할 것을 권했지만 이진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 내는 탁구 안 한다고 몇 번을 말했노. 난 만화가가 될끼다. 니까지 그라지마라. 안 그래도 울 엄마땜시 속 상한데. “


“ 내는 니캉 같이 있고 싶어서 안 그러나. 미안타. 내 이제 그만 보챌끼다. “


이진이도 애경이와 같이 있는 것이 좋다. 한 달간 같이 합숙을 하면서 애경이가 더 좋아졌다. 애경이는 진짜 언니 같다. 키도 작은 것이 잘 흘리고 다니는 이진이를 잘 챙겨주었고, 먹기 싫어했던 홍삼도 애경이의 설득력에 결국 먹기 시작해서 진짜 체력이 좋아졌다. 그리고 애경이와 복식 하는 것도 좋았다. 애경의 빠른 속공의 공격과 이진이의 롱커트의 조화는 뚱땡이 홍코치의 안목에서 만들어졌다. 이진이의 특기인 역회전 서브를 넣고 애경이 상대의 리시브를 속공으로 처 버리면 백발백중 3 구안에 득점을 하는 것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애경은 계획적으로 준비하고 노력으로 실천해서 꼭 해내는 야무진 선수이다. 반면 이진이는 즉흥적이며 감정적인 면이 많아 경기를 즐기나, 반복적인 훈련을 싫어하는 선수이다. 뭐든지 새로 시작을 할 수 있는 게 그림이라면, 탁구대 위에서 작은 공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반복적으로 훈련을 해서 몸이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일 정도가 되어야하는게 싫었다. 마치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삼손의 맷돌 돌리기 형벌 같다. 애경이는 절대 아니겠지만 이진이는 그렇게 느껴지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혼자있던 시간이 많았던 이진이는 오빠의 숙제 공책 맨 뒷장에 몰래 그렸다가 뒤질나게 맞기도 했다. 이진이가 그린 캔디와 친구들을 그림 속에서 끄집어내어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 속 캔디는 부엌에서 떠드는 쥐 소리에 겁먹지 말라며 함께 해 주었고, 늦은 밤 밖에서 방황하는 오빠와 바람난 엄마의 부재를 잊게 해주는 친구였다. 이진이는 캔디처럼 눈망울이 여러 겹 그려져 있는 친구와 함께하는 세계가 좋았고, 어른이 되어서도 함께 할 것이다.


며칠 뒤 늦은 밤 집에 누군가 찾아왔다. 탁구의 명문 중학교, 애경이 진학을 확정한 학교의 탁구 감독과 코치가 이진이의 허름한 집을 찾아온 것이다. 엄마는 깜짝 놀라는 척을 했지만 어설픈 연기였다. 감독이라는 분은 연세 지긋한 수녀님이었다. 수녀님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이진이와 엄마가 누우면 꽉 차는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코치는 키가 큰 남자였는데 비좁은 방 대신 천장이 낮은 부엌 한쪽에 구부정하게 서서 이진이를 무척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넸다.


“ 네가 이진이구나? 탁구만 잘하는 게 아니라 얼굴도 이쁘게 생겼네. 만나서 반가워. 난 나성관 코치라고 해. 잘 부탁해. “


서울 말투에 얼굴까지 잘 생긴 아저씨였다. 뒤 이어 수녀님이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 이진이가 탁구를 포기한다는 소식이 멀리 있는 우리 학교까지 들렸어요. 소년체전 때 수녀님은 이진이 탁구 치는 모습을 보고 팬이 되었는데, 이건 너무 안타까운 소식이예요. 그래서 수녀님이 코치님 모시고 직접 찾아왔어요. 이진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운동하면서 얼마든지 좋아하는 그림 그릴 수 있어요. 학교에 미술선생님한테 수녀님이 특별히 부탁해서 개인지도를 하도록 해 줄 수도 있어요. 우리 이진이 수비수가 전국에서 일등 하는 거 쉽지 않아요. 그리고 이진이의 신체조건은 수비 탁구에 너무 잘 어울려서 마치 나비 같다고나 할까? 우리 이진이 탁구 포기하면 안 돼요. 수녀님이 기숙사 생활 불편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예요. 그리고 음… “


단칸 방과 부엌의 살림살이를 훑어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이진이는 특별 장학생으로 기숙사 무료 제공에, 매달 용돈도 수녀님이 줄 거예요. 물론 큰돈은 아니지만요. “


이진이는 탁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두는 것이라고 대꾸하고 싶었다. 한국말을 더빙한 여주인공 같은 수녀님의 고상한 말투에 주눅이 든 이진이는 입만 삐쭉 내밀고 듣고만 있었다. 그 옆에서 엄마는 천주교 신자처럼 수녀님 말끝마다 끄떡끄떡 대며 이진이를 압박하였다.

수녀님은 그렇게 자기 말만 잔뜩 늘어놓고, 코치에게 이제 밤이 깊어 이진이가 어여 자야 한다며 가 버렸다. 엄마가 타 준 믹스커피에는 손대지 않은체 말이다.


이진이를 못 떼어내서 안달이 난 엄마는 매일 이진이를 설득하고 윽박지르다가, 결국 숨겨뒀던 하얀 약봉투를 내놓고는 니 죽고 나 죽자며 협박까지 도달했고, 이진이는 맥없이 승복하고 말았다. 어린 소녀가 어른들의 당근과 채찍을 견디기에는 감독수녀님은 노련했고, 엄마는 무대포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기도 전 이진이는 박애경과 같이 경주 계림국민학교로 강제 전학을 당했다. 아이러니하게 소년체전 때 라켓을 잃어버려 일명 빠따감독이었던 감독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다. 영춘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홍코치는 진짜스승이었다. 애경이와 이진이의 성장을 위해서 명문학교로 보내야한다며 교장선생님을 설득했다. 그리고 코치자리에서 잘렸다. 이진이의 토끼 삼형제 복수는 자동 무산되었다.


그렇게 타인의 결정으로 이진이는 탁구 명문 중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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