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스위스 여행

by 길이

여행은 추억 속 단막과 글로 남겨져있다.


늦은 밤 도착한 밀라노역에서 느꼈던 낯선 무서움

마테호른에 다가갈수로 느꼈던 거대한 아름다움

잘못 선택한 신발에 대한 원망으로만 걸었던 길

그리고 아직까지 고치지 못한 마음의 병



2016년 9월 13일

다음 주말에 스위스 여행을 가려고 한다.

주변에는 간다고 말을 해놨지만, 내 마음은 아직 확정 짓지 못한 채, 배낭 하나에 햇반, 컵라면, 장조림 캔, 김, 짜 먹는 고추장을 일단 챙겨둔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정하지 못하고 있다.

점점 두려움이 커진다. 아마 용기내어 비행기를 타더라도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2016년 9월 18일

정하지도 못한 마음을 안고, 밀라노행 탑승권을 받았다.

짐은 부치지 않은 건 그나마 잘한 짓인 것 같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시원한 스무디 한잔을 사들고 두 시간 전부터 탑승구 앞까지 왔다.이제 마지막 관문

기내 안으로 용기내어 들어가보자.

물론 그게 해보자고, 용기내어본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 마지막 기회다 타지말자!’

‘ 타고 떠나고 싶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내면의 싸움으로 결국 타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크게 밀려오고 있을때쯤, 소란스럽게 친한 동료가 나타난다.

관심도 없던 회사 얘기, 안하던 남 욕에, 며칠 전의 술자리 얘기까지하며, 비행기 출발시간 이십 분 전까지 떠들다가 탑승구로 나를 밀어 넣었다.


“ 형, 잘 다녀와.”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동료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지켜봐 주었다.


‘고마운 녀석’

누구보다 장거리 비행을 즐겼던 나였다.

기내에서의 편의점스러운 식사와 와인을 마시면서 보는 최신 영화 한 편과, 마음먹고 읽으려고 아껴둔 책을 꺼내 읽다가 스르륵 잠들어 버리는 기분은 정말이지 고급진 휴식이었다.

그런 내가 기내를 두려워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근무중에는 수시로 들락거리는 기내를 무서워한다는게 말이 되느냐 말이다.

근무 중에 지상직원 호출로 들어가는 기내와, 여행을 목적으로 타는 기내는 다른 세상이었다.

하늘에서 보는 구름 위 석양은 눈에 담을 수 있는 만큼 가득 담으려 했었고,

이스탄불에서 스위스로 가는 경로에서 보이는 만년설의 산들은 온 신경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절대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못된 병이 근무중에는 안도지는데, 여행을 목적으로 비행기만 타려고 하면 공포가 되어 밀려오니 말이다.


기내 안, 이봐 거짓말처럼 괜찮다.

약간의 두통과 아주 살짝 스며드는 갑갑함을 빼고는 아주 양호한 편이다.

승무원이 빨리 와인을 줬으면 좋겠다. 약간의 와인만 있다면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다.


‘ 밀라노에 도착하면 늦은 밤일 텐데, 호텔까지 잘 가야 할 건데, 밀라노역에서 걸어가도 되는 거린데, 도착하면 자정이 넘을 텐데, 찾아가겠지 뭐... ’


타기전의 온갖 잡스러운 걱정이 무색할만큼 쉽게 푹 잠들어 버렸다.

늦은 밤 도착한 밀라노 공항은 환했고, 다행히 밀라노 중앙역으로 가는 버스도 바로 있었다.

하지만, 밀라노 중앙역의 밤은 어둡고 무서웠다.

화려한 도시라기에는 밤은 너무 조용했고, 먹잇감을 찾는 집시들과 험하게 생긴 택시 기사들만이 서성대고 있었다.

역에서 도보로 가능한 호텔을 일부러 예약했지만, 예전에 로마 전철 안에서 털린 지갑과 항공권으로 고생했던 추억?도 있고, 늦은 밤 여자 혼자 배낭 메고 있다는 건 모두의 타깃이라, 그나마 덜 험상궂게 생긴 기사의 택시를 탔다.

예상했던 대로 역 주변을 뱅글뱅글 돌더니, 걸어서 15분인 거리를 15분 넘게 태워 다니다가 내려줬다.

바가지보다 안전하게 세이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 군말 않고 달라는 대로 주고, 드디어 아주 허접한 모텔 같은 호텔 방 침대에 누웠다.

피곤하고 낯설지만 그래도 이국적인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어여자고 내일 사랑하는 스위스로 떠나야지.



2016년 9월 19일

밀라노역 출발 - 스위스 체르마트행

기차표를 두 장 받았다. 역무원은 브리그역에서 환승하라고 했다.

식사는 한 끼 넘겨도 상관없고 배고프면 두 끼째 채워 넣으면 되지만, 정신은 깨워야 하기에 3.8유로 지불하고 나름 비싼 커피 한잔 사들고 기차에 올랐다.


스위스의 풍경을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 도로모솔라역에 도착하니, 기차 안에서 스위스 검사관이 여권 검사를 시작했다. 그게 국경을 넘어간다는 알림이기도 하다.

랜덤으로 검사하는 것도 모르고 여권을 공손하게 들이미니, 검사관은 예의있게 보는 척하고 지나가는 모습에 괜히 혼자 뻘쭘했다.


‘환승 브리그, 환승 브리그’ 하며 달달 외우고 있던 브리그역에서 내려 체르마트로 가는 레인을 찾았으나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낯선 여행에서는 모르면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의심스러우면 또 물어봐야 한다.

친절한 역무원 할아버지가 내가 어설퍼 보였는지 출발 시간이 임박한 레인까지 같이 뛰어 준 역무원 할아버지 덕분에 14시 41분에 드디어 체르마트에 도착했다.

가이드 북의 설명처럼 자동차가 거의 없었고, 눈도 콧구멍도 모든 것이 쾌적했다. 비싼 커피 덕분인지 공기덕분인지 정신까지 맑아졌다.


역 근처에 있는 관광안내소를 찾아 유스호스텔을 예약했다.

돈과 여권만 안전하면 되니, 다섯 명이 자야하는 룸으로 배정받았지만 상관없었다.

관광 지도 하나 들고 어슬렁어슬렁 숙소를 찾아 나서는 길은 별생각도 없고 행복했다.

늦은 밤도 아니고 저 멀리서 마테호른이 날 반기고 있는 게 보이니, 이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했다.

난 이런 낯설고 이국적인 곳에서 여유롭고 안전하게 돌아다니는 여행이 너무 좋다. 모험심이 강하지 않아서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스위스가 딱이다.


숙소 가는 길에 들른 작은 COOP 마트에서 작은 주스 같은 와인을 한 병 샀다. 마테호른을 향한 벤치들이 즐비한 명당에 앉아, 햇반 위에, 캔 장조림과 고추장을 짜서 올린다. 와인 한 모금과 어울리는 천국의 맛이다. 잊을 수 없는 풍경과 맛이었다.



2016년 9월 20일

고르너그라트 전망대 가는 길

산악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길에 뻥 뚫려있는 풍경에, 만년설에, 기차 안에서는 탄성을 쏟아냈다.

온전한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마테호른이 또렷한 자태로 반겨줬다.

사람들은 사진 찍느라 난리였고, 나 또한 핸드폰으로 정신없이 여러 장 찍어었는데 지금은 없다.

막상 도착한 전망대는 솔직히 그저 그랬다. 아마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이미 다 누렸나 보다.

내려오는 기차에서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 멋져 보여, 즉흥적으로 다음역에서 내려 버렸다.

이럴 거면 편도만 기차표를 살 것을 스위스 물가는 특히 교통편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인데 말이다.

나의 즉흥적인 트레킹의 결과부터 말하자면 보름뒤쯤 양쪽 엄지발톱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나름 신중하게 선택한 등산화의 앞부분은 너무 딱딱했고, 내리막길만 걷다 보니 발이 앞쪽으로 쏠려 나중에는 맨발로 걷다가, 뒤로 걷다가, 다시 신고 퉁퉁 부은 발로 몇 시간을 걸었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뻥 뚫렸던 길이라고만 알았는데 보지 못했던 숲 속 길을 통과 해야 했고, 숲 속에서 길도 잘못 들어 한참을 헤메다가, 해가 지기 직전에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늦은 밤 녹초가 된 몸으로 늦은 저녁으로 선택한 컵라면과 빛이 났던 마테호른의 야경은 끝내주는 레스토랑이었다. 너무 힘들어 COOP에 들리지 못해 와인이 없었던 것은 너무나 큰 실수였다.


2016년 9월 21일 ~ 22일

익숙한 인터라켄으로 이동했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라우트 브르넨의 작은 마을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박을 정하고, 동네를 어슬렁 거리다가 다음날 취리히 공항으로 이동하여 한국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게 나의 짧은 마지막 스위스 여행이었다.

지금은 스위스를 가려면 상담과 처방을 받아야 할 것 같다.

며칠 전 뉴욕행 저녁 비행기가 출발 램프에서 리턴을 했다.

기내에서 공황장애로 하기를 요청 한 외국인 승객때문이었다.

다행히 그 승객은 부친 수하물이 없어 빨리 다시 출발하였지만, 아마 그 승객도 타면서도 못 탈 것 같은 예감에 수하물을 위탁하지 않는 나름의 배려를 한 것 같다.

미국국적의 이십 대 승객은 언제쯤 고향으로 갈 수 있으려나, 감히 그 승객의 심정이 어떨지 감히 상상이 간다.


눈이 자꾸 녹고 있다는데, 이번에는 한겨울에 가고 싶다. 그 차갑고 시원했던 공기를 다시 느끼고 싶다.

2월의 스위스는 생각보다 춥지 않았고, 컵라면은 더 맛있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