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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이 Jan 24. 2023

흐림 뒤 맑음

우울증 자가검진




  진단 이후 우울증 자가 검진(PHQ-9)을 해보니 모든 항목이 해당됐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위치를 확인받은 느낌이었다.


1. 기분이 가라앉거나, 우울하거나,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24시간 우울에 절여져 있었다. 유리병 속 잼 같았다. 진득하고 끈적거렸다. 언뜻 표면이 고체처럼 보여 손가락으로 살짝 건들면 움푹 꺼지고 말았다. 이유 없이 슬펐고, 빈 방을 바라보듯 공허함이 마음속 가득했다. 삶이 절망스러웠고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시간이 갈수록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메마른 눈물만큼 마음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홍수가 났다.


2. 평소 하던 일에 대한 흥미가 없어지거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고, 글 쓰는 걸 좋아한다. 사진 찍기와 독서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그땐 모든 것들에 흥미가 없었다. 재미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삶의 즐거움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것도 나에게 행복을 주지 못했다.


3. 잠들기가 어렵거나 자주 깼다 혹은 너무 많이 잤다.


  초진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손에 꼽았다. 매일같이 새벽 늦게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4. 평소보다 식욕이 줄었다 혹은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무언갈 먹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남자친구의 걱정에 못 이겨 수저를 휘적거렸다. 나중에는 씹는 것조차 힘들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음식을 거부했다.


5. 다른 사람이 눈치챌 정도로 평소보다 말과 행동이 느려졌다 혹은 너무 안절부절못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항상 멍 때렸다. 말이 느렸고 작은 편인 목소리는 입을 닫아버려 그마저도 듣기 어려웠다. 남자친구와는 거의 고갯짓으로 소통했다. 기운이 없어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축 처지는 상태로 말을 하려니 남의 기운마저 뺏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6. 피곤하고 기운이 없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에너지를 모두 다 소진한 느낌이었다. 매일 피곤했고 씻는 것도 버거웠다.


7. 내가 잘못했거나,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자신과 가족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했다.


  사는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내 가치도 바닥을 기었다. 쓸모없는 게 살아서 뭐 하느냐고 매일 같이 자조했다. 모든 일이 내 잘못이었다.


8. 신문을 읽거나 TV를 보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일상이 완전히 무너졌다.


9.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혹은 자해할 생각을 했다.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들 때면 진심을 다해 죽고 싶었다. 도시의 야경을 보며 죽음을 생각했고, 빨간 불인지도 모른 채 횡단보도를 건너다 클락션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마음에도 적신호가 켜진 채 죽음과 삶 양극단을 횡단했다.




  우울증 환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울이 바래졌다가 선명해지는 걸 반복해 가며 살아왔기에 너무 힘들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다들 이 정도로 힘든 걸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면 남들도 다 힘들어. 하고 나의 힘듦을 묵살해버리곤 했다.


  푸른 괴물과 함께 하는 일상은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언젠간 이것에게 완벽하게 지거나, 항복하거나. 이길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커지거나 유지되는 한이 있어도 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것을 데리고 사는 게 익숙해져 더는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이 나를 포기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매번 감정에 잡아먹히는 바람에 정신 못 차리는 내게 의사 선생님은 몇 번이고 손을 뻗었다. 깊은 우울로부터 날 끌어올리려 했다. 그의 노력이 계속되는지도 모르다가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을 때쯤, 진심 어린 다정한 위로가 마음에서 차가운 손끝으로 닿을 때쯤 천천히 수면 위로 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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