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Shame)은 나를 안에서부터 갉아먹습니다. 수치심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나한테는 고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막연한 기분입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수치심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를 묻는 대신, "내가 이번엔 또 무얼 잘못했을까"부터 고민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꾸만 웅크리게 만들고, 숨고 싶고 혼자이고 싶게 만듭니다. 어차피 뭘 해도 안될 것 같은 그런 기분 있죠. 그래서 수치심이 많은 사람은 타고난 능력에 비해 발전이 더디며, 속으로는 나쁜 사람은 아닌데 인간관계에도 서툰 경우가 많습니다. 튼튼한 멘탈로도 버티기 힘든 세상, 나의 수치심을 바로 아는 것만으로도 나의 내면을 훨씬 평온하게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수치심은 원래 나쁜 아이가 아닙니다.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수치심 또한 우리 조상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줬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타나는 걸테니까요. 수치심의 원리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흥미로운 실험이 있습니다. 원숭이 무리 여럿을 대상으로, 무리 안에서의 서열에 따라 원숭이들의 세로토닌 수치가 변화하는 걸 관찰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서열이 낮은 원숭이일수록 세로토닌 수치가 낮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원숭이를 다른 무리로 옮겨 거기서는 제일 서열이 높은 원숭이가 되게 했더니, 세로토닌 수치가 바로 상승한겁니다 (Raleigh et al., 1984). 세로토닌 수치는 고정된 게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무리 내 서열에 따라 반응한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세로토닌은 우리 몸속 신경 전달 물질입니다. 세로토닌 수치가 낮으면 대체로 활동력이 떨어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위축된 기분을 느껴 스스로 고립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Dellwo, 2024; Underwood, 2010). 그래서 세로토닌의 수치를 높여주는 약들이 우울 증세를 완화하는데 흔히 사용되기도 하구요 (Nord, 2024). 그런데 세로토닌의 원래 목적은 우리보다 강한 자한테 함부로 덤벼 스스로 목숨을 단축시키지 않도록 보호하는 장치일 수도 있겠다, 조심스레 추정해봅니다.
어쩌면 무리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장착된 수치심은, 본래 목적대로 활용하면, 남들 보기에 내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삼가도록 제어해줍니다 (Underwood, 2010). 사회에서 중시하는 규범이 있다면, 그 규범을 가능한 따라야 기분이 좋고, 남들이 멋지고 대단한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에도, 관계에도 열심이게 해줍니다. 반면, 수치심이 본래 목적을 잃어버리면, 객관적인 현실과는 무관하게 나의 서열을 낮게 인식하여, 활동력을 떨어뜨리고 스스로 고립시키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일에서도, 관계에서도 객관적인 서열이 실제로 낮아져, 갈수록 삶이 꼬여만 갑니다.
원래 든든한 아군이어야 하는 수치심이, 현실을 왜곡해서 인식하게 만드는 특정 경험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내담자를 만나보면,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기 버림 (self-abandonment; Priebe, 2022)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거나, 학창 시절 왕따를 당한 경험이 가장 크게 작용하더라구요. 이 두 상황 모두, 내가 아직은 상황을 통제할 힘이 없는 상태에서 벌어집니다. 부모도, 학교 다니는 것도, 내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음이 너무 아픈 상황들이 벌어지고, 이런 나를 최대한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몸과 머리가 합심해서, "내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거니, 더는 대들지 말자"라는 코드를 마음 속에 심어둡니다.
이렇게 내 탓을 하도록 하드 코딩된 수치심은 객관적인 상황이 바뀌어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어 이제는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었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상황마다 대처할 다양한 스킬을 습득했고, 나만의 경쟁력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위기 상황에서 나를 지켜줬던 수치심이라는 보호 장치가, 어른이 되어서는 나를 무겁게 짓누르기만 합니다. 나는 여전히 힘이 없다는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마치 서열이 낮았던 원숭이가 무리를 옮겨 신분 상승을 했는데도, 여전히 주눅들어 지내는 것 같은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내 상황이 어렵고 막막하게만 느껴진다면, 외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부분들은 분명 있을겁니다. 하지만 "너는 원래 문제가 있어, 너는 뭘 해도 안돼"라고 무의식 속 무한반복하는 버그부터 뿌리뽑지 않는다면, 문제인 "나"라는 내부의 적과 싸우느라 정작 직면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많은 내담자들이, "나"라는 문제를 파고드느라, 여러 모로 자기 진단도 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을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해결해야 할 현실 속 문제들에는 효과적으로 대처를 못합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문제의 원인을 전부 나에게서만 찾다보니, 문제되는 상황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봤을 때에만 나올 수 있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숭이 무리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이 원숭이 무리가 마음에 안 들면, 저 원숭이 무리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 각자 무리에서 최고 원숭이가 되는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는 반면, 끊임없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평생 2등 시민이 된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불행하게 지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다양한 만큼,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는 걸 수치심은 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수치심이 다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내 수치심의 볼륨이 지나치게 높아져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점검해보는 건 어떨까요.
연습 1. 일주일 동안, 내가 나에게 머릿속으로 하는 말들을 알아차려 노트에 적어두자. 나에 대한 지나치게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횟수가 하루 평균 몇 회 정도인가?
연습 2.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원인을 나 자신의 타고난 문제 이외에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있는지 3가지만 나열해보기.
연습 3. 내가 최고가 될 수 있는 분야를 하나 생각해 보기 (Ikigai의 4가지 기준을 참고하기: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하는 일, 돈이 되는 일,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
참고.
Dellwo, A. (2024, May 11). Serotonin deficiency: What to know. Verywell Health. https://www.verywellhealth.com/what-does-low-serotonin-feel-like-3972959#:~:text=Emotional%20symptoms%20associated%20with%20low,self%2Desteem%20and%20self%2Dconfidence
Nord, C. (2024). The balanced brain: The science of mental health. Princeton University Press.
Priebe, H. (October 10, 2022). Self-abandonment: What it is and how to stop doing it [Video].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fcRRfH9k0w0.
Raleigh, M. J., McGuire, M. T., Brammer, G. L., & Yuwiler, A. (1984). Social and environmental influences on blood serotonin concentrations in monkeys. Archives of General Psychiatry, 41(4), 405-410.
Underwood, A. (2010, March 13). A little help from serotonin. Newsweek. https://www.newsweek.com/little-help-serotonin-170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