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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싹책방 Jun 08. 2024

모욕할 권리가 있다는 착각

박지영의 <누군가는 춤을 추고 있다>

 이번에는 입대한 지 10일이 채 되지 않은 한 훈련병이 세상을 떴다. 떠들었다는 이유로 40kg의 군장을 메고 중대장으로부터 여러 가혹 행위를 당한 것이 사인이었다. 불행한 사고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 주체가 명백한 죽임이라는 사실을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갑질'이 우리 사회에서 비일비재한 현상이 된 지 오래지만, 최근 들어서 갑질이라고만 칭하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도 지나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작년에는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젊은 교사가, 얼마 전에는 경기도 김포시의 공무원이 지속적인 악성 민원으로 인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부당한 지시나 요구가 당연한 듯 반복적으로 이뤄지고 결국 을의 위치에 선 사람들이 고통받는 상황. 약자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적인 고문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박지영의 단편 <누군가는 춤을 추고 있다>는 “쌍X”이라는 욕설과 함께 시작된다. 작품 속 “쌍X”이 지칭하는 대상인 ‘민주’는 모욕받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인물이다. 서술자인 ‘나’는 그런 그녀를 면밀히 관찰한다.


 아버지와 직장 상사로부터 “쌍X” 소리를 들은 이후에도 민주에게 부당함과 모욕은 끊이지를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모욕에 익숙해지고 웬만한 모욕쯤은 즐기기까지 하는 인물이 된다.

 그러던 중 민주는 구립 아트센터의 하우스바이저 자리에 추천을 받아 면접을 보게 된다.

 면접관은 민주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모욕당한 적 있죠?"

 면접관은 민주라는 인물이 응당 모욕받고 살아왔음을 전제로 한 질문을 던진다. 항상 을의 입장에 섰을 민주가 갑들의 불만을 어떻게 ‘슬기롭게’ 처리했을지, 갑의 입장에서 평가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에 민주는 모욕적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면접관의 입맛에 맞게 답한다. 그러나 민주는 자신이 어쩌다가 스스로 '모욕됨이 기본값인 인간'이 됐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민주가 다시 그 면접관을 만났을 때 자신은 모욕받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싶었으나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면접관으로부터 되돌아온 말은,

 "잘할 것 같았어요."였다.

 민주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머릿속이 꽃밭'이어서 좋겠다는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면접관으로부터 잘할 것 같았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고서, 결국 모욕당하는 삶을 견뎌내기 위해 민주 스스로 꽃을 피워 왔다는 점을 깨닫는다.

 을이라면, 머릿속을 ‘꽃밭’으로 꾸며 어떤 부당함이나 모욕조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 이 소설은 모욕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민주, 즉 우리 사회 을들의 꽃밭에 대관식을 거행하며 끝난다.


 이렇듯 작가는 모욕이 일상화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약자들의 주체적인 고군분투를 긍정하면서도 누구도 ‘그런(모욕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더하여 모욕을 주고받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작년, 드라마 <더 글로리>의 인기가 대단했다. 가해자들에게 잔인한 괴롭힘(드라마에서 피해자 몸에 고데기로 화상을 입힌 행위는 실제 학교폭력 사례이다.)을 당했던 피해자가 그들에게 복수하는 내용. 가해자 5인방이 몰락하리라는 대략적인 결말은 누구나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측 가능한 줄거리임에도 <더 글로리>가 각광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의 치밀한 준비 끝에 결국 복수에 성공하는 ‘사이다’와 같은 전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이다’와 같은 전개가 인기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드라마 속 사이다로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현실 상황이 답답하고 꽉 막혔기 때문은 아닐까. 현실에서 부당한 짓을 일삼는 강자들에게 들이박을 수 있는 용자를 찾기란 어렵다. 어느 정도의 모욕과 부당함은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 을에게 요구되는 미덕이자 생존의 요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동조가 을의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 언급하듯, 모욕은 '네까짓 게 감히?'를 전제한다. 갑질을 포함한 모든 모욕의 유형은 상대가 을이며 약자라는 계산을 마친 이후에 이뤄진다. '각자도생', '무한경쟁'이라는 말들이 유독 어울리는 요즘, 남들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위치를 자꾸만 확인하려 한다. 결국 편협한 기준을 갖고서 비교 대상을 물색하다가 ‘내가 저 인간보다는 우월하다’는 식의 결론을 내리기 마련이다.

 누군가보다는 열등했을지 몰라도, 지금 저 사람보다는 우위에 있다는 그릇된 인식이 모욕할 권리가 있다는 착각을 낳는 듯하다. 이는 공무원들에게 제기하는 악성 민원으로, 중대장이 지시하는 가혹한 고문 행위로 표출되고 있다. 아무리 삭막한 무한 경쟁의 사회일지라도 공동체의 일원들을 무도하게, 가학적으로 찍어 눌러 굴복시키는 행태를 도대체 언제까지 지켜봐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면 ‘상담원도 누군가의 가족입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언젠가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상담원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측은 발신자일 테지만, 오히려 갑질을 자제해 달라고 상담원이 부탁을 해야 하는 지경이다. 이 아이러니한 안내 음성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 사회가 친절을 강요하고 남을 모욕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일상화된 모욕을 방관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누적된 모욕들이 치사량에 이르러 생을 마감하게 되는 안타까운 사례가 얼마나 더 발생할지 두렵다. 그래서 누군가를 모욕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이 갑질공화국의 악벽에 균열을 내기를 소망한다. 무엇보다, 가학적인 모욕들로 삶의 의지를 잃어가는 이들에게 당신은 '그런 모욕을 당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367쪽)라는 작가의 문장이 한시바삐 가닿기를 바란다.



(이미지 출처: 또 다른 동은이들 없게…‘더 글로리’가 보낸 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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