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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균탁commune Jan 20. 2023

코뮤니스트로 살아가기

아직 열리지 않은 미래, 코뮤니즘(-과학적 코뮤니즘이야기)

 전 세계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물가가 상승하며 사람들은 살아가는 일에 팍팍함을 느낀다. 살아가는 것이 고통인 삶, 하루하루가 빚에 허덕이고 막막한 삶이 연속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이러한 삶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목숨이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월세를 내기 위해 한 끼의 밥을 굶기도 하며 결국에는 살아간다. 

 삶이 이렇게 팍팍해지고, 여러가지 어려움이 우리 앞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조금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한다. 하지만 이 투쟁 역시 권력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에 막혀 끝내는 빛을 보지 못하고 실패할 때가 많다. 그럴때면 우리의 머리를 스쳐가는 것, 그것이 바로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삶을 꿈꿨던 마르크스의 사상이다. 아니 마르크스의 사상 뿐만이 아니다. 유토피아라는 세계를 꿈꿨던 모든 사람들의 사상이다. 아나키스트 프루동이 그렇고, 바쿠닌이 그렇고, 크로포트킨이 그렇다. 사회주의를 주장한 마르크스가 그렇고, 엥겔스가 그렇고, 레닌이 그렇다. 그 뒤를 이어 받은 알튀세르가 그렇고, 지젝 등 수많은 철학자의 철학이 그렇다. 또한 푸리에가 그렇고, 꽁트가 그렇고 유토피아를 꿈꾼 모든 사람들의 사상이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들은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현실 속에 존재할 수 없는 사회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현재에도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 중국이 그렇고 북한이 그렇다. 하지만 붕괴된 소련도, 현재의 북한과 중국도 모두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단지 일당 독재의 국가로 독재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회주의는 없을까? 이 세상에 진정한 사회주의는 아직 없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다는 말이고 존재하도록 만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의 본 뜻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꿈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꿈꿀 수 있다. 그리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반드시 꿈꾸어야만 한다.

 나는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생디칼리스트, 공상적 유토피아주의자 모두가 꿈꿨던 세상에서 행복을 발견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실상 그들이 공통으로 꿈꿨던 부분을 찾아보고자 한다. 과연 그들이 공통으로 꿈꾸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공통으로 꿈꾸었던 세상은 아마 '코뮤니즘(communism)'사회였을 것이다. 크게 분류하여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를 비교하자면 둘이 최종적으로 꿈꾼 세상은 같다. 둘 다 코뮤니즘의 사회를 꿈꿨다. 다만 그 세상으로 가기 위한 약간의 방법 상의 차이만 존재했을 뿐이다. 아나키즘은 코뮤니즘이라 불리는 소규모 공동체 사회로 바로 가는 방법을 원했고,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단계를 거쳐 소규모 공동체 사회로 가는 길을 원했다. 이 두 차이가 둘을 서로 다른 사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두 사상이 원하는 세상은 동일한 세상이다. 바로 소규모 공동체 사회, 그 속에서 모든 개인이 행복을 누리는 사회,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쉽게 오해하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규모 공동체 사회라고 하면 사람들은 원시 공동체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소규모 공동체의 사회는 원시공동체와 다르다. 어떤 부분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냐면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은 원시 공동체처럼 수렵과 채집, 조금의 경작을 통한 행복을 꿈꾸지 않는다. 물론 자연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연과 인간을 동일한 유물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맞다. 하지만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은 과학의 진보를 믿는다. 과학이 올바르게 진보되었을 때, 그때에서 비로소 인간이 온전히 행복을 누릴 조건이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의 책 『게으를 수 있는 권리』만 보아도 그렇다. 

 인간에게는 게을러 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게으르다는 것이 전적으로 방 안에서 뒹굴뒹굴 노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시간을 얻는 것이다. 즉, 과학이 발달되어 노동에 투자되는 시간을 줄임으로써 줄어든 노동 시간 만큼 개인 각 자가 자기계발에 시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즉 폴 라파르그에 의하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줄 하나의 방법과 수단인 것이다.


  현대 인간은 아직도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에 신음하고 있다. 잉여가치를 생산하여 자본가의 배를 불려주고 있다.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인가? 인간은 모두 같이 행복할 수 없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려면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참다운 모습을 볼 줄 알아야한다. 구소련이나 중국, 북한처럼 변질된 사회주의가 아닌 마르크스와 크로포트킨 등이 말한 진정한 코뮤니즘을 보았을 때, 우리는 참다운 행복을 꿈꿀 수 있다. 즉, 진정한 코뮤니즘, 과학에 의해 정립된 코뮤니즘, 그리고 한 번도 실행된적 없는 코뮤니즘을 꿈꿀 수 있다. 잠깐, 여기서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다는 말은 어폐가 있을 수 있어 잠시 집고 넘어간다. 코뮤니즘의 세계는 아주 잠깐 이 세상에 존재했다. 그것도 프랑스와 대한민국에 아주 잠깐 동안의 기간이지만 소규모 공동체의 자치가 실행된 적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의아할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코뮌이 모든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에 맞는 일을 하고, 서로를 존경하는 시절을 잠깐 겪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동학이 그 시절을 잠깐 동안 누렸다. 동학의 접주, 즉 농작물을 공동으로 분배하고 서로 돕는 사회가 일제에 의해 우금치에서 몰살되기 전까지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부 자본가의 이익에 빌붙은 사람과 자본주의의 산물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한다. 파리코뮌을 통해 보았던 것을 그리고, 동학을 통해 우리가 보았던 것을. 그것은 바로 코뮤니즘의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한 사람의 독재를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나는 자칭, 타칭 코뮤니스트다. 아나키즘으로 치우친 사람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에 치우친 사람도 아니다. 다만 코뮤니즘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한 세상, 개인 하나하나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 즉 소규모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위해 글을 쓸 것이다. 그리고  없는 세상이 아닌, 헤르도토피아의 꿈을 이루기 위해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가 가진 부조리와 문제점을 파헤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아직 전 세계에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주위에도 부와 가난, 전쟁과 기아, 정신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코뮌이라는 공간, 없는 유토피아가 아닌 있는 헤르도토피아를 찾아 가는 기행을 모두 함께 떠났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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