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1)
이상은 권태라는 자신의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녹색, 온 세상을 녹색으로 물든 계절이 권태롭다고, 그리고 회색에서 권태를 벗어나고 싶다고. 이상이 말한 회색은 도시다. 도시는 권태롭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인 나는 녹색도, 회색도 모두 권태롭다. 어쩌면 나의 우울증의 시작은 권태였는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권태... 살아가는 이유? 그것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과 공포가 엄습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죽음과 공포에 대한 무서움도 한두 번이지 반복된다면, 그건 더이상 무서움으로 작용할 수 없다. 오히려 익숙함이 될 뿐이다. 우울증 환자는 죽음이라는 것을 많이 생각한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단어를 너무 오래 생각했기에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은 더이상 무섭지 않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린 환자들이 자살을 쉽게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앞에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나 역시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했었다. 모두 어처구니 없이 실패했지만 말이다. 만약 성공했다면... 이 말에 무서움을 느끼는 사람은 우울증 환자가 아니다. 그러니 '자살에 성공했다'는 단어가 무섭게 다가온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우울증 환자 아님을 명심하고 안심하라. 그런데 만약 이 말에서 어떠한 느낌도 무서움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우울에 한 발을 들여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울증에 걸린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아니, 앞의 글에서 말했듯 나에게 맞는 병원을 찾아 의사와 진지하게 상담해보는 것이 좋다.
우울증은 병이다. 그러니까. 그 병은 치료하면 괜찮아진다. 초기에 발견했다는 것은 그만큼 치료할 가능성도 높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서둘러 병원을 찾아보고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만나는 것이 좋다. 앞의 글에서 말했듯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은 잘못 진단되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잘못된 진단으로 엄청나게 고생하지 않았던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권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권태, 권태, 권태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를 어떻게 견디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의 경우, 나의 경우는 모든 것이 다 권태다. 마치 로또를 맞아 일확천금을 얻은 사람이 작은 돈이 들어오는 것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듯 어떠한 새로운 일에도 아무런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것은 살아가는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 그렇다고 자신의 옆에 우울증 환자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살아가는 희망을 주고자 이런저런 이야기와 행동은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그건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사람을 더 괴롭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신의 호의도 아무런 흥미를 일으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깊은 권태의 늪에 빠져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녹색과 회색에서 모두 느끼는 권태, 그 권태는 정말이지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변화에 둔감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변화에 둔감해진다는 것은 모든 신경과 정신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 아니 어쩌면 죽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권태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권태는 우리의 정신을 지배할만큼 무서운 것이다. 그런 권태가 매일, 매시간, 매순간 머릿속을 채우고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보라. 세상에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재미를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일에 얽매여야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 삶에서 권태를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인 내가 감히 한 가지 조언을 해보자면, 사소한 행복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사소한 일에도, 큰 일에도 아무런 흥미가 없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권태, 그 무서운 질병에서 벗어나야 한다. 녹색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회색에서 도시의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아주 사소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자신의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우울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우울증 환자는 권태가 이미 온몸을 잠식한 상태이다. 그러니 죽음이라는 것이 더이상 공포가 아닌 것이다. 죽음이 공포였다면, 우울증 환자가 자살하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드리 자살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공포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을 살아가는 당신, 권태에서 벗어나라. 나는 이미 그런 감각 세포들이 죽어버려서 느끼지 못하지만 당신은 할 수 있다. 아니, 나도 할 것이다. 나도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우울증 환자도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무슨 일이든 벌여보라. 나는 엄청난 일들을 벌이고 있다. 그것이 좌절을 느끼게 할 때면 더 심한 우울의 덫에 걸려 죽음에 한 발 더 다가서지만, 그럴 때마다 또 새로운 일을 벌인다.
그 새로운 일이 다만 발버둥이라도 좋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나를 지배하는 권태가 나를 놓아줄 수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좋다. 권태는 수시로 사람의 몸을 잠식할 준비를 하고 내 주위를 떠돌고 있는 아주 사악한 녀석이다.
그 녀석의 저주에 걸리지 않으려면 움직여야 한다. 몸도 움직여야 하고, 머리도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지만 나를 감싼 공기 같은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니 벗어나려고 발버둥칠 수 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권태가 지속되면 우울증이 찾아오고 말 것이다. 그러니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소한 날개짓이라도 하자. 그 날개짓으로 깃털이 하나 뽑혀나간다해도 당신의 몸에는 무수한 깃털이 있다. 그러니 끊임없이 날개짓을 하자.
이상은 날개라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날자. 날자. 날아 보자꾸나. 나는 소설 날개와 수필 권태를 연결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권태를 피하기 위해,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날자, 날자.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것들을 위해 깃털이 뽑혀 나가는 고통이 있어도 날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