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턴, 캐나다
비 오는 날 회 먹는 거 아니라고 듣긴 했는데, 선풍기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는 굳건한 신념을 결코 버리지 않는 부모님 말씀처럼 한 귀로 흘려듣는다. 빗소리 들으며 푸짐한 생선회를 마주하니 소주가 착 혀에 감긴다. 백색 형광등 불빛 아래에 영롱하게 찰랑이는 소주를 반 잔씩 털어 마시며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다.
부부 사이에 껴도 위화감이 들지 않는 건 반복되는 일상에 치여 단조로워지는 부부간 대화가 타인의 대화 참여로 인해 다채로워지는 묘미를 서로가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했던 이야기 또 해도 듣는 귀가 바뀌면 몇 번이고 질리지 않는다.
시간은 촉박한데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많으니 접점이 있던 없던 모아서 만났다. 비슷한 연배라고, 교육업에 종사한다고 아니면 서로 학부모라는 공통점을 내세우고 그것도 안되면 남편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라도 끌어왔다.
하필 어린이날 하루 종일 비 예보에 놀이동산이니 뭐니 북적북적한 야외 이벤트는 다 취소한 김에 애들은 친정에 보내고 차분하고 조용한 내성적인 외국인 남편들 서로 좀 어울릴 기회를 만들어 주자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기어이 합석을 시켰다.
저 냥반들 저렇게 말 많이 하는 건 처음 본다며 감탄하는 아내들을 보며 내심 흐뭇해하고 남편들은 영어로 폭풍수다, 아내들은 남편들 배려할 필요 없이 한국어로 다다다다... 모국어 대화가 이렇게 즐겁다니 새삼 감탄한다. 실컷 몇 시간을 떠들고도 자세한 이야기는 2차 가서 하자며 자리를 옮긴다.
2차는 소주! 3차는 맥주! 술이 술술 들어간다. 이렇게 집 밖에서 마음 편하게 술 마시며 마음 가는 지인들과 시시콜콜 별 일 아닌 것에 웃고 떠들고 하는 게 얼마만인가. 사소한 것에 마음 상하고 사소한 것에 감동하며 모든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것으로 시작한다. 이 작고 사소한 모든 것이 모여서 일상이 되고 일 년이 되고 평생이 되는 것이니 나의 사소하고 소소한 행복은 떠올리면 미소 짓게 되는 사람들과의 기분 좋은 대화에서 시작된다.
즐거운 대화 상대자가 되겠다는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좋은 대화상대는 상대방 말을 잘 듣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건 내가 제일 부족한 부분이다. 남 하는 말 안 듣고 떠벌떠벌 혼자 신나게 떠들고 있는 나 자신을 인식할 때 가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가끔 나만큼 떠드는 거 좋아하는 만만치 않는 수다꾼을 만나 내가 떠들 기회가 줄어들 때는 동족혐오에 빠지기도 한다. 도대체 다들 자기 말만 하는 와중에 대화가 된다는 게 신통방통할 때도 있다.
수다꾼들의 치열한 접전을 직관하던 다소 과묵한 친구가 옆에서 뒤집어지게 웃기만 하다가 밥값만 나눠 내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기가 빨린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라는 걸 체험한 날이었다. 수다를 실컷 떨었는데 개운하지 않은 건 왠지 수다 배틀에서 재기발랄한 대응을 못하고 은근히 치였다는 느낌을 받은 탓일 터이다.
남의 말 좋게 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요점을 파악해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잘 전달하는 말하기 신공은 평생에 걸쳐 연마해야 할 필살기! 다들 알고 있지만 쉽게 얻지 못하기에 내 능력치 한계를 느끼며 나는 살짝 엇나가기로 한다. 엄청 좋은 대화 상대자는 못 되어도 살짝 좀 웃기고 같이 있으면 재밌는, 눈이 맑은 도른자가 되는 것으로 궤도를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